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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키지의 [시각에 대한 은유들로부터]로부터

 

    Bart Testa는 <The Act of Seeing With One’s Own Eyes>(이하 the Act)를 아방가르드 다큐멘터리로 정의하고 ‘보여주기’가 아닌 ‘보기’의 영화화를 구현한 사례로 소개했다.1) 테스타는 ‘보여주기’의 사례로 Franju의 <짐승의 피>를 예로 들며, 이 영화가 “도축 이미지의 잔인함”을 보여줘 관객에게 불편함을 안겨줌과 동시에 윤리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무덤 속에 있는 프랑쥬가 매우 서운해할 만한 분석이다. 물론 윤리적 차원에서 현대인의 무감각함에 대한 고발의 목적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프랑쥬가 ‘보여주려’ 했던 것은 그것 이상이었기 때문에. 
   테스타는 <짐승의 피>를 ‘보여주기’의 예로 들며, <the Act>를 그와는 다른 ‘보기’의 영화로 설명했다. 그는 ‘보기’의 영화를 정의하길, 특정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장치들을 제거하고, 그래서 어떠한 해석의 여지도 주지 않는 영화라고 말하는데 나중에 가서는 <the Act>가 부검 행위를 신비스럽고 제의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라고 분석한다. 순수한 보기의 영화라면 그것이 어떻게 신비스러울 수 있고 제의적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단지 뻘겋고 하얀 색들이 뒤섞여 있고 누군가 무엇을 자르고 뜯어내는 영상일 뿐이다. 결국 <the Act>가 하나의 영화로 구성된 이상 순수하게 보는 행위 그 자체를 가능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었을 것이다. 불가능하지만 그것에 도전한 스탠 브래키지의 시도는 탁월해 보이나 테스타의 분석은 미흡하다.  

   스탠 브래키지의 글, [시각에 대한 은유들로부터]를 읽고 <the Act>를 다시 생각해 본다. “지각에 관한 인위적인 원근법에 지배되지 않는 눈”,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눈”, “모든 사물의 이름에 반응하지 않고 지각의 모험을 통해서만 알아내는 눈”. “‘녹색’을 의식하지 못한 채 풀밭을 기어가는 아이는 무수한 색깔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브래키지 본인의 언명을 적극적으로 시도해보고자 한 작품이 <the Act>라고 생각된다. 그는 시체 부검 장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가 포착한 이미지 다발을 그저 ‘볼 것’을 요구한다. 그의 의도대로라면 장소도 사건도 휘발된다. 무언가 움직이는 게 있고, 흘러내리는 것이 있고, 분리되는 것이 있고, 명도와 채도가 다른 색들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에 브래키지는 그 색감에 대한 탐구를 위해 7가지 종류의 필름을 사용했다.2)  

   <the Act>를 보면서 처음에는 조금 괴로웠으나 이내 감정을 다스리고 두 눈을 부릅뜨고 볼 수 있었다. ‘순수한 시각’은 그것을 상상할 수 있고, 시도해 볼 수는 있지만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수 년간 잔혹한 영상을 보면서 어느 정도 강도가 센 장면에 학습이 된 측면도 있고, 이성적으로 ‘이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라고 계속 주문을 외웠기 때문에 <the Act>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영화 속의 부검의들 그리고 실제 우리 주위에서 오늘도 십수 건의 외과 수술을 집도하고 있을 의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이 ‘순수한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은 아니다(수술대 앞에서 오히려 그들의 시각은 그 누구보다도 정교하다, 정교해야만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개교기념일에 조조로 <이벤트 호라이즌>을 보러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빨간 색의 벽으로 둘러싸인, 텅 빈 상영관 한 가운데에 앉아 스크린을 서서히 채워가는 피의 물결을 보고 있던 그 순간이 유난히 괴로웠고 차마 눈을 뜨고 계속 보기가 힘들었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왜 내가 신체의 훼손과 피의 물결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 적잖이 고민했었다. 그런 감정은 학습에 의한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갓난 아이가 호러 영화를 보고 공포를 느낄 수 있을까? 풀밭에서 ‘녹색’이라는 색 개념을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라면 두개골을 절개하는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브래키지가 <the Act>에서 부검 장면을 촬영 소재로 사용한 것은 그것이 누가 보아도 견디기 힘든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극도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큰 장면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가 논하는, 어떤 지각이나 감정이 제거된 ‘순수 시각’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이쯤하니 ‘순수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녹색’을 의식하지 못한 채 기어가는 아기에게 풀밭에 무슨 ‘색깔’이 있겠는가. 그저 무수한 반사광들이 망막에 맺힐 뿐, 아기에게는 ‘색깔’이라는 개념도 없기 때문에 그저 무언가 보일 뿐이지 않을까. 브래키지가 상상한, 아기가 풀밭에서 무수한 색깔을 감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기가 아니라 카메라에서 가능한 것이다. 기계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차원에서 브래키지의 상상을 구현한 모델은 (현실에서는 존재 불가능한) ‘기억의 천재’ 푸네스다.3) 그에게 ‘녹색’은 없다. 모든 것이 그대로 지각되고 기억될 뿐이다.
   두려움과 공포의 감각은 학습된 측면이 있지만, 본능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아이가 풀밭이 아니라 시체더미 위를 기어가고 있다면… Herz Frank의 <10 minutes older>를 보면 꼬마 아이들이 그 아름다운 눈망울로 무언가를 계속 바라보며 울고 웃기를 반복한다. 그 아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보고 어떤 기제로 인해 그런 표정을 짓게 되었을지, <the Act>를 보고나니 더욱 궁금해 진다.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정보와 학습된 기쁨과 두려움, 어느 쪽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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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art Testa, “Seeing With Experimental Eyes” in Documenting the Documentary, ed. Grant and Sloniowski [Detroit: Wayne State University, 1998]
2) “The rhythm reflects directly my feelings, my movements, my heartbeat, my aversion at times. In this case, I use seven kinds of film, EF daylight, EF tungsten, [Ektachrome] MS, Kodachrome tungsten, Kodachrome daylight, commercial Ektachrome . . . plus two filters, plus three light sources.” Stan Brakhage at Millenium, Millenium Film Journal 47-9. 2007-8
3)  ”그는 <개>라는 종목별 기호가 다양한 크기와 형상들을 가진 상이한 수많은 하나하나의 개들을 포괄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그는 (측면에서 보았을 떄) 14의 3에 있는 개와 (정면에서 보았을 때) 4의 3에 있는 개가 왜 똑같은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 골머리를 앓았다.”  보르헤스 [픽션들]. 기억의 천재 푸네스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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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의 불> Run-through
LG아트센터 리허설 룸, 2012년 10월 13일. 

 

 

아름다운 사람들
무용수: 김주빈, 김지혜, 신상미, 용혜련, 이강현, 조형준, 하미라
안무가: 정영두 

정영두 안무, 두 댄스 씨어터 신작 <먼저 생각하는 자- 프로메테우스의 불>
Doo Dance Theater “Forethought-Prometheus’Fire” 

http://www.lgart.com/Home/Perform/Calender_view.aspx?seq=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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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ri

Jiri

Jiri

Jiri

2012.08.21. 아부지와 함께 지리산 등반.
천왕봉에 도착하자마자 폭우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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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respondance

Correspondencia     Correspondence
          Correspondance
               꼬레스뽕당스, 교감?

   호세 루이스 게린(Jose Luis Guerin)이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에게 보내는 “영화-편지”에는 호세 루이스 게린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창문에 반사된 모습이나 그림자로 등장할 뿐이다.  요나스 메카스는 스스럼없이 그의 주름지고 검버섯핀 얼굴을 카메라 앞에 들이댄다. 게린의 얼굴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메카스의 영화-편지에서 발견된다. 메카스가 오래된 필름 슬라이드를 살펴보는 장면에서, 그가 아마도 지금 게린의 나이 정도였을 무렵에 찍혔을 법한 필름이 카메라에 잡힌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작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주름이 없는, 젊은 요나스 메카스의 얼굴. 그 안에서 지금 호세 루이스 게린의 얼굴을 본다.

   [서신 교환]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글에서 유운성 평론가는, 앙트완 베르만과 폴 리쾨르를 경유해 “영화-편지 교환은 모놀로그의 씁쓸함 속에 갇히지 않고 낯선 것이 주는 시련을 통해 스스로의 낯섦을 깨닫기 위한 ‘언어적 환대’(linguistic hospitality)로서의 번역과 유사한 것”으로 설명한다. 환대. 알랭 그르니에는 그의 아버지 쟝 그르니에가 조르쥬 뻬로스라는 청년에게 보낸 답신에 대해, 그것은 “환대하는 내용이기는 하나 간결하며 신중”(Geroges Perros-Jean Grenier, Correspondance[1950~1971])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다소간의 긴장감이 서려있는 환대. 때때로 침묵하는 스크린. 

   아래 편지글은 또 다른 환대. 내게도 힘을 주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작가 지망생 프란츠 카푸스에게 보내는 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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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1908년 성탄절 다음 날.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의 아름다운 편지를 받고 내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당신은 아십니까? 당신이 주신 소식은 현실적이고 명백해서 좋은 소식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오래 생각할 수록 그 소식이 실제로 좋은 소식이라는 느낌이 더 강해집니다…  이번 성탄절 휴일 동안 나는 자주 당신 생각을 했고, 큰 남풍이 산을 한꺼번에 집어삼킬 듯이 불어닥치는 텅빈 산과 산 사이에 있는 쓸쓸한 요새 안에서 당신이 얼마나 적막할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직함과 제복과 업무, 잡을 수 있고 제한된 이 모든 것들은 그 수가 많지 않은 고립된 부대원들과 함께 있는 그런 환경에서는 진지함과 필연성을 띠게 됩니다. 그것은 군인이라는 직업상의 유희적인 요소와 시간보내기를 넘어 주의 깊은 응용을 의미하며, 독자적인 주의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런 주의를 갖도록 교육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때때로 위대한 자연의 사물 앞에 세워놓는 상황 속에 우리가 있고, 그 상황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가 필요한 전부입니다.

   예술도 살아가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가면서 모르는 사이에 예술을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비현실적인 얼치기 예술적 직업에서보다는 모든 현실적인 일 안에서 예술에 더 가깝게 이웃해 있습니다. 그런 직업은 예술에 가까운 체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예술의 현존재를 부인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그 안에 빠져드는 위험을 극복하고, 어디선가 거친 현실 속에서 고독하고 용감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다가오는 해가 당신을 그런 상태로 지켜주고 더 힘을 주기를 바랍니다. 

변함없는 당신의 R. M. 릴케
([릴케의 편지], p.93~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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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여름 ‘시네바캉스 서울’에서는 [서신 교환] 섹션의 영화 3편만을 감상했다.
   라쿠에스타-가와세(8/2), 게린-메카스(8/14), 에리세-키아로스타미(8/26). 빅토르 에리세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서신 교환’은 시네바캉스 마지막 상영작이었다. 요새 한창 편집 중인 작업이 있는데, 서신 교환을 보고나면 작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역시 혼란스러웠던 머리 속이 맑아지는 느낌. 이런저런 메모들. 간간히 들리는 노작가들의 육성에 특히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었다.

   집에 돌아와 별 생각 없이 ‘서신’에 대한 글을 찾아 인터넷을 잠시 헤메다 문득 ‘김현’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라면 분명 누군가와 서신을 통해 속 깊은 대화를 나눴으리라. 나는 문학(계)을 잘 모르고, 김현 선생님도 잘 모르지만(아마도 사숙할만한 다른 문인들이 또 많이 있을 것이다) 군복무 시절 [두꺼운 삶과 얇은 삶]을 처음 읽고 이후 선생의 글을 계속 찾아 읽은 연유로, 사색의 산책로를 소요할 때마다 자주 선생의 문장과 마주친다. ‘김현’과 ‘서신’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해 검색했더니 이인성 작가가 김현 선생의 서신을 소개하는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77. 9. 8.’이라는 날짜가 적혀있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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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성 군에게,

   오늘 편지 받았소. 요즈음엔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을 번역하고 있는데, 거기에 그런 귀절이 있었소. 베르렌느의 “저 지붕 위로 하늘은 얼마나 파랗고 고요한가”라는 詩行을 인용한 뒤에, 감옥에서(!) 쓴 것에 감탄하고 나서, 바 先生 말씀이 혼자 있을 때는 누구나 감옥에 있지 않은가 라고. 그럴듯한 말 같았소. 인성이가 그리워하는 것에서 떠나 있다고 생각할 때, 누구나 사실은 그러리라고 생각한다면, 고독하다는 것도 그리 절망적인 것은 아니리라 생각하오. 중요한 것은 산다는 것, 그리고 산다는 것이 작가에게는 말과의 싸움이라는 것(그 말 속에는 말을 만들어낸 무수한 묘상이 숨어 있을 것이오)을 깨닫는 일이 아닌가 하오. 가짜로 살고 가짜로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마시오. 그 순간에 아픔은 말이 되어, 아픔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오. 삶 속에서 그 아픔의 등가물을 찾도록 애를 써보시오. 하하, 이러니까 수신교과서를 쓰는 것 같소. 소설은 좀 잘 써지오? 소설을 쓰시오. 그러면 조금은 아픔을 아픔으로 느낄 수가 있을 것이오. 갈수록 나는 개새끼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오. 삶이란 게 개새끼가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면 그 삶이란 것도 참 한심할 것이오. <한국문학의 位相>을 끝낸 후에, 약간은 허탈감에 빠져 있었는데, 요즈음은 바 先生 번역을 시작했소. 일요일 쯤 심심하면 놀러오시오. 소주나 한 컵 합시다.

                                                                                                 김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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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선생님 홈페이지 www.leeinseong.pe.kr, ‘골방의 낮은 숨결’ 게시판에서 발췌) 

 

   바슐라르를 ‘바 先生’이라 칭한 것을 보고 크게 웃었다. 바 선생!  아,
   가짜로 살고 가짜로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마시오. 그 순간에 아픔은 말이 되어, 아픔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오. 삶 속에서 그 아픔의 등가물을 찾도록 애를 써보시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갈수록 나는 개새끼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오. 삶이란 게 개새끼가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면 그 삶이란 것도 참 한심할 것이오. 

   소주나 한 컵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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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는 몸을 숙인 채 손을 입에 갖다 대고 숨을 쉬면서 자기 발 옆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루스가 추위에 얼어 죽은 가엾은 짐승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루스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컬러 잡지, 그러니까 ‘스티브의 잡지’같은 것이 아니라 신문에 무료로 끼워지는 밝고 경박한 잡지였다. 광택 있는 종이에 양면 광고가 게재된 부분이 펼쳐져 있었는데, 종이가 물에 젖고 한쪽 귀퉁이에 진흙이 묻었지만 내용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칸막이를 최소한으로 줄인 아름답고 현대적인 개방형 사무실에서 서너 명의 사람들이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무실과 사람들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스는 곁에 와 있는 내게 말했다.
  “‘저런 곳’이야말로 일하기에 ‘적당한’ 장소 같아.” (p.202)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 2005)].
  헤일셤이라는 격리된 공간에서 자라나고 있는, ‘기증’을 위해 복제된 아이들. 그 중 한 명인 루스는, 우연히 마주친 길가에 떨어져 있는 잡지에서 자신이 평소에 꿈꾸던 이미지를 발견한다. 아름답고 현대적인 개방형 사무실, 농담을 주고받는 사람들, 활기찬 분위기. 그녀가 ‘근원자’를 찾아나섰을 때, 그녀의 ‘근원자’로 보이던 여자는 마치 그 잡지 속의 사진과 같이 커다란 유리창 너머 사무실 안에서 사람들과 유쾌하게 농담을 주고 받고 있다. 루스와 그녀의 일행은 유리창에 기대 사무실 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곳은 멋지고 아늑하고 안정된 세계의 표상처럼 보였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루스가 커다란 유리창 너머 대형 사무실 안에서 그녀의 ‘근원자’를 찾는 모습에, 대기업 사무직을 동경하는 수많은 취업 준비생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기증’의 운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클론들의 모습을 담담한 어조로 섬세하게 서술한다. 여기, 도서관에서 토익 문제집을 열심히 풀고 있는 학생들,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착취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착취되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취업 준비생들의 열기가 뜨겁다. 그들은 경쟁의 운명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래서야 결국 소모되고 버려지는 복제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복제인간을 다룬 소설 중, [나를 보내지마]와 같이 잔잔한(?) 문체의 SF 소설로는 샤를로테 케르너의 [블루프린트(Blueprint, 1999)]가 있다. [나를 보내지마]에서 친구들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 캐시의 나이는 서른한 살이다. [블루프린트]에서 피아니스트 이리스 셀린은 서른한 살의 나이에 그녀의 클론, 시리 셀린을 갖게 된다. 시리는 서른한 살의 나이에 그녀의 첫 번째 개인전을 연다. ‘서른한 살’에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시리 셀린, 시리. 영어 원문으로는 Siri.

  Carey Mulligan… “Never let me go”와 “Drive”  

carey

carey

   나는 길고 곧은 해안 도로를 따라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눈 앞에 포석이 깔린 젖은 길이 죽 이어져 선명하게 펼쳐져 있었다. 잠시 후 약 30미터 앞에 밴 한 대가 와서 서더니 차에서 광대 복장을 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차의 뒷문을 열어 한 박스 정도 되는 헬륨 풍선을 꺼내서는 한 손으로 잡은 채 몸을 숙이고 다른 손으로 차 안을 여기저기 뒤적거렸다. 좀 더 다가가자 그 풍선들에 얼굴이 그려져 있고 귀 모양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작은 부족 무리 같은 풍선들이 주인이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며 위에서 건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광대는 몸을 일으키고 차 문을 닫은 다음 한 손에는 작은 수트 케이스를 들고 다른 손에는 풍선을 든 채 나보다 몇 걸음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곧고 길게 뚫려 있는 해안 도로를 걷는 그 시간이 내게는 까마득히 오랜 세월처럼 여겨졌다. 때때로 나는 그런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졌고, 심지어는 그 광대가 몸을 돌려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나 역시 그 쪽으로 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아침부터 줄곧 젖어있던 인적 없는 도로를 따라 그와 나는 계속 걸었고 그러는 동안 풍선들은 나를 내려다보며 웃으며 서로 몸을 부딪쳤다. 풍선 줄을 모아 쥔 남자의 주먹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풍선 줄을 한데 꼬아 단단히 쥐고 있었지만, 나는 줄 하나가 그의 손을 빠져나가 그 줄에 매달린 풍선이 구름 낀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나를 보내지마],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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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트럭이 날마다 공장을 떠난다. 하나는 창고와 백화점으로, 다른 하나는 쓰레기장으로. 우리를 둘러싼 이야기는 첫번째 종류의 트럭만 주목하라고 우리를 훈련시켜왔다. 반면 두번째 종류의 트럭에 대해서 우리는 쓰레기 더미가 눈사태처럼 쓰레기 산으로부터 무너져 내려와 우리 뒷마당을 둘러싼 울타리를 뚫고 침범하는 경우에만 생각한다. 험한 지역, 더러운 거리, 도시 빈민굴, 망명자 수용소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제한 구역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런 쓰레기 산들을 현실에서든 생각에서든 찾지 않는다. 관광할 때 들떠서 모험을 하는 중에도 그런 지역들을 조심스럽게 피해 다닌다(또는 그런 곳을 피하도록 인도된다). 우리는 극히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쓰레기를 처리한다. 즉 쓰레기를 보지 않음으로써 보이지 않게,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든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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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하기로 했던 쓰레기 수거 아르바이트가 이제 하루 남았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 근무. 새벽 6시에 시작해 오후 3시~ 3시반 종료. 마포구를 맡고 있는 4개의 청소대행업체 중 한 곳 소속으로 청소 지역은 연남동, 서교동, 동교동, 노고산동, 대흥동, 신수동. 소위 “홍대 앞” 전 지역을 담당하는 순찰조의 작업원 역할. 순찰조는 기사, 작업원 2인 1조로 1톤 트럭으로 이동하며, 야간에 청소차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생활쓰레기(종량제 봉투에 담겨 있는) 및 재활용폐기물과 마대에 담겨 나오는 특수폐기물을 수거한다. 그 외에도 정기적으로 음식물쓰레기통을 갈아주는 일을 하고, 회사로 직접 접수되거나 구청을 통해 전달되는 각종 쓰레기 관련 민원을 처리한다. 

굉장히 많은 쓰레기가 나온다(이것도 야간 작업조에 비하면 세발의 피). 1톤 트럭에 쓰레기가 가득 차면, 폐기물 처리장이 있는 차고지로 이동해 쓰레기를 버리고 온다(생활쓰레기, 재활용폐기물, 특수폐기물을 각각 따로 처리). 새벽 6시부터 정오까지 이 싸이클이 세 번 정도 돌아가는 데 쉴 틈이 거의 없다. 일반 종량제 봉투에 음식물쓰레기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고, 봉투가 제대로 묶여 있지 않거나 터지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에 냄새도 심하고, 옷도 금새 더러워지기 쉽다. 뭐,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작업복이 더러워지는 일은 드물다. 늘 군화를 신고 일한다. 군화는 가볍지 않아 움직임이 편하진 않지만, 특수폐기물의 경우 깨진 유리, 부러진 나무, 못 등 다치기 쉬운 것들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에 작업용 신발로 적격이다. 내용물에 따라 다르지만 100리터 쓰레기봉투는 대부분 무게가 꽤 나간다. 특수폐기물이 담겨 있는 마대는 혼자 들기 힘든 경우가 많아 기사님과 함께 트럭에 옮겨 싣는다. 폭염 속에서 무거운 짐을 바쁘게 옮기려다 보니 잠깐 움직여도 땀이 많이 난다. 그래서 이동하는 트럭 안에서 수시로 물을 마신다. 체중이 많이 줄었다.


도시는 매일 새로워지면서 단 하나의 결정적인 형태로 스스로를 완전히 보존해 나갑니다. 바로 그저께의, 그리고 매달, 매년, 십 년전의 쓰레기들 위에 쌓이는 어제의 쓰레기 더미 형태로 말입니다.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p.149)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때, 회사에서 문서를 만들 때, 카페에서 글을 쓸 때, 몰입 상태에서 빠져나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때가 자주 있었다. 예를 들어, 극장에서 다큐멘터리를 보는 데 그것이 환경문제나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는 내용이라면 시원한 공간 속, 편안한 좌석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이 뭔가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어제’ 거리에서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맞고 눈물, 콧물을 질질 흘렸더라도 당장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있으면 내가 그저 적당히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엄습한다. 적어도 이번 기회에는,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일, 종일 모니터를 바라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고 뭔가 온몸을 이용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을 들여다 보고 있거나 TV나 인쇄매체의 광고들을 보고 있으면 가끔 다들 부질없는 소꿉장난에 열심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물론 나도 그 “장난”에 자주, 기꺼이, 즐겁게 동참한다). 모두들 대단히 생산적이다.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고상하고 거창한 말들을 어설프게 조합한 댓가로 급료를 받는 것보다는 골목을 뛰어다니며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이, 마음이 훨씬 편하다. 누군가를 속일 필요가 없는 일이고, 쉬이 감각의 극한을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개미 안녕, 바퀴벌레 안녕, 구더기와 생쥐도 가끔 안녕. 동마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날이 다르지만,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는 매일 1순위로 순찰을 돌며 폐기물을 수거한다. 새벽 6시에도 거리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 쌓여있는 쓰레기 봉투들과 헤어짐이 아쉬워 서로 감싸안은 팔을 풀지 못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레네오 푸네스에 대한 보르헤스의 이야기는 마치 현대(성)의 기만적인 희망에 대한 임박한 부정을 예견하는 것만 같다.([쓰레기가 되는 삶들], p.41) 
나의 기억력은 마치 쓰레기 하치장과도 같지요.(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픽션들],p.148)
 

차고지의 폐기물 처리장에서는 환경미화원들의 수작업으로 폐기물 분류가 한 번 더 진행된다. 여기 계신 분들은 늘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일을 하시는데, 언젠가 그 라디오에서 ELO의 Midnight Blue가 흘러나온 적이 있었다. 쓰레기 더미, 그 사이사이로 허리를 숙인 미화원들, 그 풍경 위로 아름답고 몽환적인 멜로디. 고등학교 3학년 여름, 혼자 여행 중 대구에 들렀을 때 동성로 타워레코드에서 Midnight Blue가 담겨져 있는 ELO의 ‘Discovery’ 앨범을 샀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CD플레이어로 ‘Discovery’를 들으며 매우 행복해 했던 기억. 대형폐기물이 쌓여있는 곳에서는 혹시라도 서핑보드가 버려지지 않았는지 매일 확인한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에서 주인공이 서핑 연습을 하다가 끌려와 보드복을 그대로 입은 채 쓰레기를 수거 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화면 가득 푸른 바다. 말을 못 하는 두 연인이 수평선을 따라 함께 하염없이 걷고 있다. 가끔 쓰레기 더미 속에 CD와 비디오테이프들이 보인다. 계속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선택받지 못한 누군가의 추억들이 여기저기서 버려진다. 

a scene at a sea

소비 사회의 소비자들은 쓰레기 수거인들을 필요로 하지만 소비자들 본인은 쓰레기 수거 일을 하려고 들지 않는다. 어찌됐든 그들은 고생하기보다는 즐기도록 길러진 것이다. 그들은 권태로움과 고됨과 지루한 오락에 분개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들은 본인들이 하던 일을 대신해줄 도구를 찾도록 훈련받았다. 그들은 바로 쓸 수 있는 상품의 세계로, 즉석에서 만족감을 얻는 세계로 정신이 향하도록 조정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소비 생활의 기쁨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소비주의가 표상하는 것이다. 이는 더럽거나 고되거나 진저리나거나 그저 재미없는 ‘즐겁지 않은’ 일들을 하는 것은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소비주의가 일련의 연속적인 승리를 거둠에 따라 쓰레기 수거인의 필요성은 증대하지만 쓰레기 수거인이 되려는 사람의 수는 줄어든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p.114)

왜 외상 구매와 빚을 질 기회가 몹시 필요한 것으로 느껴지고, 그렇게 열성적으로 제공되며, 그토록 기쁘고 감사하게 수용되는가?…  그것은 우리의 욕구, 욕망이나 필요를 더 빨리 그리고 더 철저히 만족시켜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비록 휘몰아치는 수요 공급 게임의 속도는 다시 생각하는 것을 거의 허용치 않지만) 외상 거래의 용이성이 주는 주요한 이점은 더이상 욕구와 욕망의 필요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들을 쉽게 버릴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한 번 더 생각해볼 때, 일단 외상으로 물건을 사고 빚 속에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면(‘빚을 지지 않으면 돈을 모르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빚을 지는 것은 ‘현명한 일로 여겨지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해 외상과 빚은 욕망의 대상들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그것들이 쓰레기 더미로 가는 여정을 더욱 용이하고 빠르게 한다. 외상과 빚으로 사는 방법이 손 닿는 곳에 늘 있는데 왜 ‘완전한 만족을 주지 않는’ 것에 매달려 있겠는가? 외상과 빚은 쓰레기의 산파 역할을 하며, 이러한 역할이야말로 소비 사회에서 외상과 빚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는 가장 뿌리 깊은 근거이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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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D[ear] D[ollie]),

난 지금 헬름홀츠(Helmholtz)의 책을 덮고 이제 헤르츠(Hertz)의 전기력 전파 부분을 다시 세심히 보고 있는 중이야. 전기동역학에서의 최소작용원리를 다룬 헬름홀츠의 논문이 잘 이해가 안됐거든. 난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이 오늘날 얘기되는 방식으로는 실재에 부합할 수 없다는 확신이 점점 들고 있어. 또 그것이 보다 간단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에테르”라는 용어가 전기 이론에 도입되면서, 그 운동이 기술될 수 있는 매질 개념도 따라오게 됐잖아. 그런데 내 생각엔, 그 매질에 물리적 의미가 있을 것 같지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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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라니 ㅋㅋ
지난 학기에 읽었던 번역서 내용 중에 최고의 번역 임팩트.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펴낸 [프리즘 : 역사로 과학 읽기]라는 책에 과학사학자 Peter Galison의 논문, ‘아인슈타인의 시계들 : 시간의 장소(Einstein’s Clocks: The Place of Time, 번역 : 정동욱)’가 실려있다. 이 글 안에 아인슈타인이 1899년 8월의 어느날, 애인 밀레바 마리치에게 보넀던 편지의 일부가 실려 있는데 위에 옮겨적은 것이 바로 그 편지 내용이다. “D[ear] D[ollie]“라는 내용을 “자기야”라고 번역한 건 너무 오바한 게 아닌가 싶어 궁금한 마음에 피터 갤리슨이 편지 내용을 발췌해 온 영문 번역판을 찾아봤다. 그가 인용한 내용은 편지의 중간 부분인데, “난 지금 헬름홀츠…” 바로 앞 문장이 다음과 같다. 

“You are such a robust girl and have so much vitality in your little body.”

아하.

대형 시계탑들로 둘러싸인 베른의 도심 환경, 특허국에서 “시간 조율 시스템” 관련 특허들을 처리했던 업무 경험이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정립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분석하는 피터 갤리슨. 20세기 초반, 대도시에서는 시계탑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산업사회의 발전을 위해 시간의 통합이 반드시 필요했던 시대. 지역마다, 사람들마다 다르게 흘러가던 시간을 하나로 조율하기 위해서는 시계탑의 역할이 중요했다. ‘아인슈타인의 시계들’을 읽을 무렵 마침 영화 <Hugo>의 원작 동화 [위고 카브레]를 같이 읽고 있었다. 위고가 맡고 있던 일은 파리 몽파르나스 역에 설치되어 있는 시계탑들의 시간을 하나로 조율하는 것. [위고 카브레]는 텍스트와 그림, 영화 스틸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먼저 등장하는 스틸이 영화<Safety Last>에서 Harold Lloyd가 대형 시계탑 시계 바늘에 매달려 있는 사진이다. 갑자기 이 사진을 마주쳤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고, 이내 너무 서글퍼졌다. 근대적 시간의 탄생과 이제 시간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

safety last 

그리고 은하영웅전설-

제국령이든 동맹령이든, 자전하는 행성은 밤낮의 교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천체란 어느 것 하나 똑같은 주기를 가진 것이 없어, 어떤 행성의 자전주기는 18시간 반, 다른 행성은 40시간 등 저마다 다른 개성을 주장한다…난감한 것은 오히려 21시간 반이나 27시간처럼 지구에 가까운 자전 주기를 지닌 행성이다. 이런 경우 시행착오 끝에 자전주기를 24등분해 행성지방시를 사용하는 경우와 다소의 불편을 감수하고 표준 24시간제를 사용하는 경우로 나뉘었다. 어느  쪽이건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적응할 수밖에 없다. 24시간이 하루, 365일이 1년. 흔히 말하는 이 ‘표준력’은 제국에서도 동맹에서도 쓰인다. 은하제국의 1월 1일은 자유행성동맹에서도 1월 1일이다. ([은하영웅전설],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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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P Chris Marker 

 

Patricio Guzmán: The Battle for Chile (Chris Marker to the Rescue) by ONFB , National Film Board of Canada

 ”제가 <첫 해(The First Year, 1972)>를 만들었을 때에요. 저의 첫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The First Year)는 아옌데 정부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산티아고의 한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었는데, 그 때 코스타 가브라스(Costa Gavras) 감독이 스탭들과 함께 <계엄령(State of Siege, 1973)>을 촬영하기 위해서 칠레에 와 있었죠. 크리스 마르께도 그 멤버 중 한 명이었습니다. 크리스는 촬영 스탭은 아니었지만, 코스타 가브라스의 친구로서 그의 촬영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크리스 마커가 극장에서 제 영화를 봤던 거에요. 그는 제 주소를 알아낸 다음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가 문을 두드렸고, 제가 문을 열었죠.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저는 크리스 마커입니다.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그를 알고 있었고, 그를 존경하고 있었기 떄문에 흥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와 함께 차를 마시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가 말했죠. 저는 당신의 작품과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당신이 그것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것을 사는 수 밖에요. 그 얘기에 또 놀랐습니다. 저는 그 다큐멘터리를 다른 나라에서 구매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는 떠났습니다. 

저는 그에게 네거티브 필름, 사운드트랙과 퍼포레이트된 마그네틱 테이프를 보냈어요. 얼마 후에 그는 프랑스어로 더빙된 버젼을 만들었습니다. 유명 배우들의 목소리를 담아서 말이죠. 프랑수아 뻬리에(Françoise Perrier), 프랑수아 아르누(Françoise Arnoul), 이브 몽땅(Yves Montand) 등이 참여했었어요. 그 버젼은 프랑스와 벨기에, 스위스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제게는 정말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버젼을 보러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시간이 더 흐르고, 아옌데 정부 말기였습니다. 우리는 촬영을 계속 해야 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작업을 계속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어요. 저는 크리스에게 연락했습니다. 제발 우리를 도와달라며 긴 편지를 썼어요. 칠레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설명했어요. 시민들의 전투가 임박했고,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고 썼습니다. 그가 전보를 보내왔더군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크리스.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한 달 후, 공항으로 우리에게 짐꾸러미가 하나 도착했어요. 3만 5천 피트의 필름이었습니다. <칠레 전투(The Battle of Chile)>는 그가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졌어요. 당시 칠레에서 필름 수입은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수입 가능한 것은 오직 자동차, 트럭, 기계의 부품 따위 밖에 없었어요. 필름이 필요하다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밀수를 하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그건 우리에게 불가능한 방법이었습니다. 저와 제 동료들은 모두 감정이 크게 복받쳐 올랐었죠. 

우리는 우리 사무실에 도착해 그 꾸러미를 열었습니다. 저는 그 전까지는 새 필름통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것들은 로체스터에서 온, 코닥 필름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유효기간이 지난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었었습니다. 망가지고 녹이 슨 필름통 속에 있는 것들로 말이죠. 그 필름통은 새 것이었어요. 그건 마치 장식품 같았어요. 아름다운 물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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