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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루스는 몸을 숙인 채 손을 입에 갖다 대고 숨을 쉬면서 자기 발 옆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루스가 추위에 얼어 죽은 가엾은 짐승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루스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컬러 잡지, 그러니까 ‘스티브의 잡지’같은 것이 아니라 신문에 무료로 끼워지는 밝고 경박한 잡지였다. 광택 있는 종이에 양면 광고가 게재된 부분이 펼쳐져 있었는데, 종이가 물에 젖고 한쪽 귀퉁이에 진흙이 묻었지만 내용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칸막이를 최소한으로 줄인 아름답고 현대적인 개방형 사무실에서 서너 명의 사람들이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무실과 사람들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스는 곁에 와 있는 내게 말했다.
  “‘저런 곳’이야말로 일하기에 ‘적당한’ 장소 같아.” (p.202)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 2005)].
  헤일셤이라는 격리된 공간에서 자라나고 있는, ‘기증’을 위해 복제된 아이들. 그 중 한 명인 루스는, 우연히 마주친 길가에 떨어져 있는 잡지에서 자신이 평소에 꿈꾸던 이미지를 발견한다. 아름답고 현대적인 개방형 사무실, 농담을 주고받는 사람들, 활기찬 분위기. 그녀가 ‘근원자’를 찾아나섰을 때, 그녀의 ‘근원자’로 보이던 여자는 마치 그 잡지 속의 사진과 같이 커다란 유리창 너머 사무실 안에서 사람들과 유쾌하게 농담을 주고 받고 있다. 루스와 그녀의 일행은 유리창에 기대 사무실 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곳은 멋지고 아늑하고 안정된 세계의 표상처럼 보였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루스가 커다란 유리창 너머 대형 사무실 안에서 그녀의 ‘근원자’를 찾는 모습에, 대기업 사무직을 동경하는 수많은 취업 준비생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기증’의 운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클론들의 모습을 담담한 어조로 섬세하게 서술한다. 여기, 도서관에서 토익 문제집을 열심히 풀고 있는 학생들,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착취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착취되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취업 준비생들의 열기가 뜨겁다. 그들은 경쟁의 운명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래서야 결국 소모되고 버려지는 복제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복제인간을 다룬 소설 중, [나를 보내지마]와 같이 잔잔한(?) 문체의 SF 소설로는 샤를로테 케르너의 [블루프린트(Blueprint, 1999)]가 있다. [나를 보내지마]에서 친구들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 캐시의 나이는 서른한 살이다. [블루프린트]에서 피아니스트 이리스 셀린은 서른한 살의 나이에 그녀의 클론, 시리 셀린을 갖게 된다. 시리는 서른한 살의 나이에 그녀의 첫 번째 개인전을 연다. ‘서른한 살’에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시리 셀린, 시리. 영어 원문으로는 Siri.

  Carey Mulligan… “Never let me go”와 “Drive”  

carey

carey

   나는 길고 곧은 해안 도로를 따라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눈 앞에 포석이 깔린 젖은 길이 죽 이어져 선명하게 펼쳐져 있었다. 잠시 후 약 30미터 앞에 밴 한 대가 와서 서더니 차에서 광대 복장을 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차의 뒷문을 열어 한 박스 정도 되는 헬륨 풍선을 꺼내서는 한 손으로 잡은 채 몸을 숙이고 다른 손으로 차 안을 여기저기 뒤적거렸다. 좀 더 다가가자 그 풍선들에 얼굴이 그려져 있고 귀 모양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작은 부족 무리 같은 풍선들이 주인이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며 위에서 건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광대는 몸을 일으키고 차 문을 닫은 다음 한 손에는 작은 수트 케이스를 들고 다른 손에는 풍선을 든 채 나보다 몇 걸음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곧고 길게 뚫려 있는 해안 도로를 걷는 그 시간이 내게는 까마득히 오랜 세월처럼 여겨졌다. 때때로 나는 그런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졌고, 심지어는 그 광대가 몸을 돌려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나 역시 그 쪽으로 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아침부터 줄곧 젖어있던 인적 없는 도로를 따라 그와 나는 계속 걸었고 그러는 동안 풍선들은 나를 내려다보며 웃으며 서로 몸을 부딪쳤다. 풍선 줄을 모아 쥔 남자의 주먹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풍선 줄을 한데 꼬아 단단히 쥐고 있었지만, 나는 줄 하나가 그의 손을 빠져나가 그 줄에 매달린 풍선이 구름 낀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나를 보내지마],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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