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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의 편지

   올여름 ‘시네바캉스 서울’에서는 [서신 교환] 섹션의 영화 3편만을 감상했다.
   라쿠에스타-가와세(8/2), 게린-메카스(8/14), 에리세-키아로스타미(8/26). 빅토르 에리세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서신 교환’은 시네바캉스 마지막 상영작이었다. 요새 한창 편집 중인 작업이 있는데, 서신 교환을 보고나면 작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역시 혼란스러웠던 머리 속이 맑아지는 느낌. 이런저런 메모들. 간간히 들리는 노작가들의 육성에 특히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었다.

   집에 돌아와 별 생각 없이 ‘서신’에 대한 글을 찾아 인터넷을 잠시 헤메다 문득 ‘김현’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라면 분명 누군가와 서신을 통해 속 깊은 대화를 나눴으리라. 나는 문학(계)을 잘 모르고, 김현 선생님도 잘 모르지만(아마도 사숙할만한 다른 문인들이 또 많이 있을 것이다) 군복무 시절 [두꺼운 삶과 얇은 삶]을 처음 읽고 이후 선생의 글을 계속 찾아 읽은 연유로, 사색의 산책로를 소요할 때마다 자주 선생의 문장과 마주친다. ‘김현’과 ‘서신’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해 검색했더니 이인성 작가가 김현 선생의 서신을 소개하는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77. 9. 8.’이라는 날짜가 적혀있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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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성 군에게,

   오늘 편지 받았소. 요즈음엔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을 번역하고 있는데, 거기에 그런 귀절이 있었소. 베르렌느의 “저 지붕 위로 하늘은 얼마나 파랗고 고요한가”라는 詩行을 인용한 뒤에, 감옥에서(!) 쓴 것에 감탄하고 나서, 바 先生 말씀이 혼자 있을 때는 누구나 감옥에 있지 않은가 라고. 그럴듯한 말 같았소. 인성이가 그리워하는 것에서 떠나 있다고 생각할 때, 누구나 사실은 그러리라고 생각한다면, 고독하다는 것도 그리 절망적인 것은 아니리라 생각하오. 중요한 것은 산다는 것, 그리고 산다는 것이 작가에게는 말과의 싸움이라는 것(그 말 속에는 말을 만들어낸 무수한 묘상이 숨어 있을 것이오)을 깨닫는 일이 아닌가 하오. 가짜로 살고 가짜로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마시오. 그 순간에 아픔은 말이 되어, 아픔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오. 삶 속에서 그 아픔의 등가물을 찾도록 애를 써보시오. 하하, 이러니까 수신교과서를 쓰는 것 같소. 소설은 좀 잘 써지오? 소설을 쓰시오. 그러면 조금은 아픔을 아픔으로 느낄 수가 있을 것이오. 갈수록 나는 개새끼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오. 삶이란 게 개새끼가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면 그 삶이란 것도 참 한심할 것이오. <한국문학의 位相>을 끝낸 후에, 약간은 허탈감에 빠져 있었는데, 요즈음은 바 先生 번역을 시작했소. 일요일 쯤 심심하면 놀러오시오. 소주나 한 컵 합시다.

                                                                                                 김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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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선생님 홈페이지 www.leeinseong.pe.kr, ‘골방의 낮은 숨결’ 게시판에서 발췌) 

 

   바슐라르를 ‘바 先生’이라 칭한 것을 보고 크게 웃었다. 바 선생!  아,
   가짜로 살고 가짜로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마시오. 그 순간에 아픔은 말이 되어, 아픔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오. 삶 속에서 그 아픔의 등가물을 찾도록 애를 써보시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갈수록 나는 개새끼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오. 삶이란 게 개새끼가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면 그 삶이란 것도 참 한심할 것이오. 

   소주나 한 컵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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