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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hkage, 끄적끄적

브래키지의 [시각에 대한 은유들로부터]로부터

 

    Bart Testa는 <The Act of Seeing With One’s Own Eyes>(이하 the Act)를 아방가르드 다큐멘터리로 정의하고 ‘보여주기’가 아닌 ‘보기’의 영화화를 구현한 사례로 소개했다.1) 테스타는 ‘보여주기’의 사례로 Franju의 <짐승의 피>를 예로 들며, 이 영화가 “도축 이미지의 잔인함”을 보여줘 관객에게 불편함을 안겨줌과 동시에 윤리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무덤 속에 있는 프랑쥬가 매우 서운해할 만한 분석이다. 물론 윤리적 차원에서 현대인의 무감각함에 대한 고발의 목적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프랑쥬가 ‘보여주려’ 했던 것은 그것 이상이었기 때문에. 
   테스타는 <짐승의 피>를 ‘보여주기’의 예로 들며, <the Act>를 그와는 다른 ‘보기’의 영화로 설명했다. 그는 ‘보기’의 영화를 정의하길, 특정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장치들을 제거하고, 그래서 어떠한 해석의 여지도 주지 않는 영화라고 말하는데 나중에 가서는 <the Act>가 부검 행위를 신비스럽고 제의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라고 분석한다. 순수한 보기의 영화라면 그것이 어떻게 신비스러울 수 있고 제의적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단지 뻘겋고 하얀 색들이 뒤섞여 있고 누군가 무엇을 자르고 뜯어내는 영상일 뿐이다. 결국 <the Act>가 하나의 영화로 구성된 이상 순수하게 보는 행위 그 자체를 가능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었을 것이다. 불가능하지만 그것에 도전한 스탠 브래키지의 시도는 탁월해 보이나 테스타의 분석은 미흡하다.  

   스탠 브래키지의 글, [시각에 대한 은유들로부터]를 읽고 <the Act>를 다시 생각해 본다. “지각에 관한 인위적인 원근법에 지배되지 않는 눈”,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눈”, “모든 사물의 이름에 반응하지 않고 지각의 모험을 통해서만 알아내는 눈”. “‘녹색’을 의식하지 못한 채 풀밭을 기어가는 아이는 무수한 색깔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브래키지 본인의 언명을 적극적으로 시도해보고자 한 작품이 <the Act>라고 생각된다. 그는 시체 부검 장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가 포착한 이미지 다발을 그저 ‘볼 것’을 요구한다. 그의 의도대로라면 장소도 사건도 휘발된다. 무언가 움직이는 게 있고, 흘러내리는 것이 있고, 분리되는 것이 있고, 명도와 채도가 다른 색들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에 브래키지는 그 색감에 대한 탐구를 위해 7가지 종류의 필름을 사용했다.2)  

   <the Act>를 보면서 처음에는 조금 괴로웠으나 이내 감정을 다스리고 두 눈을 부릅뜨고 볼 수 있었다. ‘순수한 시각’은 그것을 상상할 수 있고, 시도해 볼 수는 있지만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수 년간 잔혹한 영상을 보면서 어느 정도 강도가 센 장면에 학습이 된 측면도 있고, 이성적으로 ‘이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라고 계속 주문을 외웠기 때문에 <the Act>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영화 속의 부검의들 그리고 실제 우리 주위에서 오늘도 십수 건의 외과 수술을 집도하고 있을 의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이 ‘순수한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은 아니다(수술대 앞에서 오히려 그들의 시각은 그 누구보다도 정교하다, 정교해야만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개교기념일에 조조로 <이벤트 호라이즌>을 보러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빨간 색의 벽으로 둘러싸인, 텅 빈 상영관 한 가운데에 앉아 스크린을 서서히 채워가는 피의 물결을 보고 있던 그 순간이 유난히 괴로웠고 차마 눈을 뜨고 계속 보기가 힘들었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왜 내가 신체의 훼손과 피의 물결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 적잖이 고민했었다. 그런 감정은 학습에 의한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갓난 아이가 호러 영화를 보고 공포를 느낄 수 있을까? 풀밭에서 ‘녹색’이라는 색 개념을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라면 두개골을 절개하는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브래키지가 <the Act>에서 부검 장면을 촬영 소재로 사용한 것은 그것이 누가 보아도 견디기 힘든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극도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큰 장면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가 논하는, 어떤 지각이나 감정이 제거된 ‘순수 시각’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이쯤하니 ‘순수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녹색’을 의식하지 못한 채 기어가는 아기에게 풀밭에 무슨 ‘색깔’이 있겠는가. 그저 무수한 반사광들이 망막에 맺힐 뿐, 아기에게는 ‘색깔’이라는 개념도 없기 때문에 그저 무언가 보일 뿐이지 않을까. 브래키지가 상상한, 아기가 풀밭에서 무수한 색깔을 감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기가 아니라 카메라에서 가능한 것이다. 기계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차원에서 브래키지의 상상을 구현한 모델은 (현실에서는 존재 불가능한) ‘기억의 천재’ 푸네스다.3) 그에게 ‘녹색’은 없다. 모든 것이 그대로 지각되고 기억될 뿐이다.
   두려움과 공포의 감각은 학습된 측면이 있지만, 본능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아이가 풀밭이 아니라 시체더미 위를 기어가고 있다면… Herz Frank의 <10 minutes older>를 보면 꼬마 아이들이 그 아름다운 눈망울로 무언가를 계속 바라보며 울고 웃기를 반복한다. 그 아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보고 어떤 기제로 인해 그런 표정을 짓게 되었을지, <the Act>를 보고나니 더욱 궁금해 진다.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정보와 학습된 기쁨과 두려움, 어느 쪽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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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art Testa, “Seeing With Experimental Eyes” in Documenting the Documentary, ed. Grant and Sloniowski [Detroit: Wayne State University, 1998]
2) “The rhythm reflects directly my feelings, my movements, my heartbeat, my aversion at times. In this case, I use seven kinds of film, EF daylight, EF tungsten, [Ektachrome] MS, Kodachrome tungsten, Kodachrome daylight, commercial Ektachrome . . . plus two filters, plus three light sources.” Stan Brakhage at Millenium, Millenium Film Journal 47-9. 2007-8
3)  ”그는 <개>라는 종목별 기호가 다양한 크기와 형상들을 가진 상이한 수많은 하나하나의 개들을 포괄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그는 (측면에서 보았을 떄) 14의 3에 있는 개와 (정면에서 보았을 때) 4의 3에 있는 개가 왜 똑같은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 골머리를 앓았다.”  보르헤스 [픽션들]. 기억의 천재 푸네스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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