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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 Marker to the Rescue”

RIP Chris Marker 

 

Patricio Guzmán: The Battle for Chile (Chris Marker to the Rescue) by ONFB , National Film Board of Canada

 ”제가 <첫 해(The First Year, 1972)>를 만들었을 때에요. 저의 첫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The First Year)는 아옌데 정부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산티아고의 한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었는데, 그 때 코스타 가브라스(Costa Gavras) 감독이 스탭들과 함께 <계엄령(State of Siege, 1973)>을 촬영하기 위해서 칠레에 와 있었죠. 크리스 마르께도 그 멤버 중 한 명이었습니다. 크리스는 촬영 스탭은 아니었지만, 코스타 가브라스의 친구로서 그의 촬영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크리스 마커가 극장에서 제 영화를 봤던 거에요. 그는 제 주소를 알아낸 다음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가 문을 두드렸고, 제가 문을 열었죠.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저는 크리스 마커입니다.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그를 알고 있었고, 그를 존경하고 있었기 떄문에 흥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와 함께 차를 마시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가 말했죠. 저는 당신의 작품과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당신이 그것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것을 사는 수 밖에요. 그 얘기에 또 놀랐습니다. 저는 그 다큐멘터리를 다른 나라에서 구매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는 떠났습니다. 

저는 그에게 네거티브 필름, 사운드트랙과 퍼포레이트된 마그네틱 테이프를 보냈어요. 얼마 후에 그는 프랑스어로 더빙된 버젼을 만들었습니다. 유명 배우들의 목소리를 담아서 말이죠. 프랑수아 뻬리에(Françoise Perrier), 프랑수아 아르누(Françoise Arnoul), 이브 몽땅(Yves Montand) 등이 참여했었어요. 그 버젼은 프랑스와 벨기에, 스위스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제게는 정말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버젼을 보러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시간이 더 흐르고, 아옌데 정부 말기였습니다. 우리는 촬영을 계속 해야 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작업을 계속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어요. 저는 크리스에게 연락했습니다. 제발 우리를 도와달라며 긴 편지를 썼어요. 칠레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설명했어요. 시민들의 전투가 임박했고,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고 썼습니다. 그가 전보를 보내왔더군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크리스.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한 달 후, 공항으로 우리에게 짐꾸러미가 하나 도착했어요. 3만 5천 피트의 필름이었습니다. <칠레 전투(The Battle of Chile)>는 그가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졌어요. 당시 칠레에서 필름 수입은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수입 가능한 것은 오직 자동차, 트럭, 기계의 부품 따위 밖에 없었어요. 필름이 필요하다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밀수를 하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그건 우리에게 불가능한 방법이었습니다. 저와 제 동료들은 모두 감정이 크게 복받쳐 올랐었죠. 

우리는 우리 사무실에 도착해 그 꾸러미를 열었습니다. 저는 그 전까지는 새 필름통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것들은 로체스터에서 온, 코닥 필름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유효기간이 지난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었었습니다. 망가지고 녹이 슨 필름통 속에 있는 것들로 말이죠. 그 필름통은 새 것이었어요. 그건 마치 장식품 같았어요. 아름다운 물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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