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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Apro, [피플]

“포틀랜드 커뮤니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하얀 새’”
[피플] 화이트 버드 공동창립자 폴 킹 인터뷰 

(인터뷰어 백종관)

http://kor.theapro.kr/?sub_num=143&pageNo=1&state=view&idx=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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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국 레지던시 작가와의 아티스트 토크’  
2015.09.18

“이빨, 다리, 깃발, 폭탄”, ”양화”, ”와이상” 상영 + 토크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다..

작품 발표는 2016년 3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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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연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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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독립영화칼럼

“아시아, 예술, 극장”
백종관, 2015.9.10

http://kmdb.or.kr/column/indi_column_view.asp?tbname=indi_column&seq=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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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야 라스잠리안숙Araya Rasdjarmrearnsook 인터뷰
http://webwhale.asianartstheatre.kr/blog/araya-rasdjarmrearnsook-interview/

(아시아예술극장 웹진 ‘웹고래’, 인터뷰 섹션) 

2014년 10월 말, 광주에서 진행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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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러한 형식 분석의 가능성을 노엘 버치는 한두 편이 아니라 수많은 영화 속에서 순전히 경험적인 방법으로 찾아냈다. 그는 이 많지 않은 분량의 저작에서만도 200편에 가까운 영화를 언급하고 있는데, 비디오테이프도, DVD도, 인터넷도 없었던 시대에, 수많은 꽃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꽃가루를 모으는 꿀벌처럼, 영화관에서 만난 수많은 영화들에서 실험과 혁신들을 하나하나 수집해서 장대한 풍경을 펼쳐 보인다…”

[영화의 실천], ‘옮긴이 해제’ 중에서.

 

   드디어(!) 이윤영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영화의 실천]이 출간되었다. 작년 1학기, [영화의 실천] 영역본을 텍스트로 강의하시면서 매 챕터, 직접 번역하신 내용을 학생들에게 나눠주셨었으니, 이미 한 번 이상 번역을 완료한 텍스트를 또 1년 이상 다시 검토하신 셈이다. 책을 받자마자 그 문제의(?) ‘개정판 서문’, 내가 발제를 맡았던 5장의 내용 그리고 옮긴이 해제부터 먼저 읽어보았다. 서평은 뒤로 미루고… 그런데 옮긴이 해제, 그 중에서 위에 소개한 부분을 읽다가 고개를 갸우뚱. ‘꽃가루를 모으는 꿀벌’이라니, 꿀벌은 꿀을 모아서 꿀벌 아닌가? 검색을 해 보았더니 꿀벌은 꿀 뿐만 아니라 꽃가루 역시 모은다고(생물 시간에 많이 맞았던 게 다 이유가 있다). 꽃가루는 꿀벌에게 매우 중요한 식량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선생님 덕분에 난데없이 생물 공부를 하고나니 마침 최근에 극장 스크린에서 만났던 또 다른 꿀벌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파리 국립 오페라 발레단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 <La Danse>. 무용을 다룬 영화라는 점보다 Fredrick Wiseman의 영화라는 점 때문에 궁금증을 못 참고 잽싸게 보고 왔다. 역시나 단지 ‘무용’과 ‘무용수’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댄스 씨어터를 구성하는 다른 많은 물질적, 비물질적요소들에 또한 주의를 기울인 다큐멘터리라 (이제 새롭지는 않지만) 흥미로웠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양봉’씬. Palais Garnier 안에만 머물던 카메라가 갑자기 옥상의 풍경을 비추는데, 거기에는 한 남자가 양봉 작업을 하고 있다. 얼마간 꿀벌들과 bee-keeper의 풍경을 관찰하던 카메라는 그리고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오페라 극장 지붕 위의 양봉 장면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증을 가졌던 모양이다. 영화가 처음 공개되었던 2009년 당시의 기사 몇 개를 찾아보니 그 장면이 꽤 자주 언급되어 있는데, 정작 와이즈먼은 그 장면에 대해 별 말이 없었다. [Film Forum]에서 진행했던 인터뷰에서는 양봉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http://www.filmforum.org/more/podcast_archive). “그 극장 지붕 위에 꿀벌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거기서 나온 꿀을 극장 샵에서 진짜 판매하고 있는데 장사가 영 시원치 않은 것 같더라구요. 그 장면을 보여주면 꿀 파는데에 좀 도움이 될까 싶어서… (웃음)

  와이즈먼의 대답은 농담이었지만, 거기에는 진심이 묻어있다. “I wanted to show that there were bees on the roof of the Paris Opera Ballet”… ‘거기 있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 자체가 그의 작업이다. 그런 차원에서 무용수들이 몸을 움직이는 장면과 비키퍼가 양봉작업을 하고 있는 장면에는 위계가 없다. (어떤 평론가는 양봉씬을 두고, 안무가, 무용수들이 발레단 디렉터 Brigitte Lefèvre의 카리스마 하에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여왕벌과 일벌의 구도로 빗댄 명백한 은유라고 쓰기도 했는데, 이는 과도한 해석으로 보인다.)

  영화 한 편 더. Lisandro Alonso의 <Los muertos>. 별다른 플롯이 존재하지 않는 이 영화는 ‘바르가스’라는 인물이 감옥에서 출소한 후 그의 딸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에는 ‘충격적인’ 영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르가스가 고목에 연기를 피워 커다란 벌집을 통째로 채집해 꿀을 빨아먹는 장면이다. 알론소도 와이즈먼처럼 관객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바르가스는 와이즈먼의 카메라처럼 문득, 그러나 태연하게 벌집을 통째로 나무 속에서 빼내어 챙긴다(그리고 또 염소의 배를 가른다). 감독의 그런 천연덕스러움이 ‘왜 당신은 이 장면(영화)을 통해 충격 혹은 당혹감을 느끼는가’라고 묻고 있는 듯 하다. 이미 어떤 ‘영상 문화-문법’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들, 마트에서 말끔하게 포장되어 있는 꿀단지만을 구매해 본 사람에게 알론소가 보여주는 세계는 너무 낯선 것이다. 그런데 그 세계는 외계에서 갑자기 침입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 우리가 잊어버린 과거이고, 돌아볼 여유없이 폐기해버린 ‘가능성’의 흔적들이 아닌가…

  노엘 버치는 정말 “꿀벌처럼” 수많은 영화에서 꽃꿀과 꽃가루를 모아 이것을 토대로 [영화의 실천]을 썼다(이윤영 선생님의 감탄처럼 “비디오도, DVD도,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 버치의 아카이빙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는 적지 않게 발견되는 버치의 ‘인용 실수’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실천]이라는 벌집 속에서 가장 달콤한 꿀이 들어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IMR이 아니라 PMR(Primitive Mode Representation, 원시적 재현 양식)이 숙성된 부분일 것이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와이즈먼의 영화도, 알론소의 영화도 모두 이 ‘원시성’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다. 관객들을 스펙터클 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영화가 아닌,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의 바깥”에 관객들을 위치시키는 영화들. [영화의 실천] 속에서 버치는, 관객을 “멀리 있는 관찰자”로 만드는 영화 목록을 쌓아갔다. 그리고 이제, 그 여정을 쫓는 것이 참 달달하다. 영역본으로 읽을 땐 참 힘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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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당스>보다 더 재밌을=_= <춤, 극장을 말하다>(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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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Rivette: 우리는 대화(dialogue)가 영화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생각을 처분했습니다. 이 점을 받아들이고,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할텐데요. 사운드 측면 외에도, 영화사에서 소위 ‘진보’로 불릴만 한 것들, 컬러나 와이드스크린, 촬영기술 등의 발전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 모든 진보가 더 완벽한 리얼리즘을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Jean Renoir: 물론입니다. 모든 예술이 다 마찬가지죠. 그런데 예술의 역사에서, 완벽한 리얼리즘은 완벽한 타락을 동반합니다. 예를 들어서 태피스트리(Tapestry) 예술의 경우, 최초로 잘 알려진 태피스트리는  바이외 테피스트리(Bayeux Tapestry)인데 마틸다 여왕과 그녀의 시녀들은 그녀의 남편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벌하는 동안 태피스트리를 만드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분명히 그녀가 사용했던 양모는 매우 원시적인 것이었고 매우 기름기가 많았을 겁니다. 염색술도 매우 기초적인 수준이었구요. 매우 제한된 숫자의 색깔만 태피스트리에 사용되었어요. 그런데도 이 태피스트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몇 세기 뒤를 살펴보면, 태피스트리가 여전히 초기 단계였죠. 예를 들어 앙제(Angers) 지방의 묵시록 태피스트리(14세기)를 보자면, 우리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환상적인 세계를 발견할 수 있어요. 꿈의 세계가 아닌 진짜 세계 말이에요. 태피스트리의 인물들은 현대적입니다. 태피스트리 속의 거리에서는 매일 성인, 왕, 여왕, 죄인, 천사들이 서로 마주칩니다. 겨우 원시적인 기술을 이용했을 뿐이지만 대단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훌륭한 왕, 앙리 4세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태피스트리 아트를 죽여버린거죠.

만약 이 이야기가 완전히 허구가 아니라면, 태피스트리에 대한 앙리 4세의 어리석음은 그의 훌륭함에 대한 많은 전설들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High-warp 제작 방식이 개발되자 앙리 4세는 Low-warp 방식을 이것으로 대체하도록 했습니다. 이 기술은 더 정교하게 실을 짤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동시에 염색에 있어서도 큰 개선이 일어났습니다. 왕은 하이-워프 태피스트리를 장려하고 돈도 더 지원하기로 결정했지요. 태피스트리 기술이 발전하면서 자연을 더 사실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즉, 태피스트리에서 단순화된 패턴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된 거죠. 이제 그들은 그림을 복사하기 시작했어요. Boucher나 Watteau의 그림과 거의 완벽하게 유사한 형태로 말이죠. 오늘날, 태피스트리는 완벽한 리얼리즘으로 기능할 수 있죠. 모든 색조가 가능해요. 녹색은 10가지 다른 색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푸른 색 그 모든 색조들, 창백한 구름에서 딥블루까지. 결과는? 태피스트리는 끝났어요. 지금 뤼르사(Jean Lurcat)같은 예술가들은 리얼리즘을 의도적으로 피함으로써 태피스트리를 되살리려고 하죠. 아아, 뭔가 슬픈 일이 일어난거죠. 그건 매우 인위적인 시도입니다. 우리는 이제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와 같은 작품을 다시 만들 수 없을 거에요.

이게 제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인간이 개발한 기술이 결국은 그 목적에 실패하도록 이끈다는 점. 인간의 지능, 얼마나 파괴적인 힘인지! 지능이란 재앙이에요. 우리를 결과적으로 멍청하게 만든답니다. 지능이 우리를 추함으로 이끈다면, 지능이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면, 경배하는 그 모든 것이 추한 것이라면? 자연을 모방하려는 우리의 경향성이 겨우 어떤 추함을 향한 것이었다면? 자연을 모방하고자 우리가 선택했던 것들은 아름다운 결과를 이뤄내지 못할 겁니다.

저는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고대의 모든 사물들은, 꼭 예술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었는데 예를 들어 고대 에트루스칸(Etruscan) 도자기를 보면 그건 정말 아름답죠. 그 모든 에트루스칸 도자기를 만든 것은 천재적인 재능이 아닙니다. 매우 원시적인 기술로 만들어진 이것들은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가? 기술이 완벽했을 때 거의 모든 것이 왜 추한가? (기술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예술가가 있다면 그가 만든 것들은 제외하구요) 바보같은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여튼 이게 늘 궁금하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예술을 한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토론과 연관지어서 나는 의문을 갖습니다. 우리의 기술적인 진보가 단지 완벽한 퇴락을 예고하는 게 아닐까. 기술적인 완벽함은 지루함만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자연을 재생산할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에서 숲을 완벽하게 재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나무 껍질의 두께까지 알아볼 수 있어요. 스크린은 더 커지고 관객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숲 한가운데 있는거에요. 나무를 만질 수 있고 숲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이끼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하는 기계가 있을 거라구요. 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들은 스쿠터를 타고 진짜 숲으로 갈겁니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아니구요. 그들이 실재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데 왜 영화를 보러 가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연을 모방하는 것은 예술형식의 죽음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Jacques Rivette: 당신 주장의 논리적인 귀결을 따져보면, 우리는 고감도 필름의 등장을 후회해야만 하겠군요. 

 

Jean Renoir: 그럼요! 나는 진심으로 그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우리는 필름-메이커에요. 그러니 그 사실을 인정해야합니다. 초기 영화의 포토그라피를 연구해야 합니다. 첫번째 미국 웨스턴인 대열차강도를 연구해야 해요. 막스 린더의 영화들의 포토그라피를 연구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위대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콘트라스트! 나는 필름의 발전을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나는 가시광선 내의 모든 색을 감지할 수 있는 필름, 팬크로마틱(panchromatic) 필름과 싸워왔어요. 난 그걸 최초로 사용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난 그걸 내 고유의 도구로 만들었죠. Vieux-colombier theater에서 나는 다락에 스튜디오를 만들었어요. <The Little Match Girl>를 찍기 위해서 였죠. 팬크로마틱필름을 이용해서! 그 당시엔 팬크로마틱은 야외촬영에만 쓰였었죠. 그리고 오소크로마틱(Orthocromatic) 필름은 실내용이었구요. 스튜디오 조명이 오소크로마틱에 맞춰 디자인되어 있었어요. 아크등, 수은증기조명 등등이 말이죠. 저는 의아했습니다. ‘팬크로마틱이 더 나을 거 같은데 왜 안쓰는거야?’ 그건 오소크로마틱의 흉한 콘트라스트를 피할 수 있는 필름이었어요. ‘팬크로마틱을 안에서도 쓰자!’ 그래서 나는 그 문제를 연구했어요. 뭐 내가 과학적인 지식이 매우 풍부한 사람은 아닌지라 필립스에서 우릴 도와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는 램프, 전기 시스템을 생산하는 사람이었어요. 그가 내게 조언을 해 줬죠. 난 친구들과 함께 직접 기계를 만들었죠. 금속을 꼬아서 가감저항기도 만들고… 마침내 우린 <The Little Match Girl>을 찍었고 화질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꽤 괜찮았어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필름을 개선했어요. 우리는 아마추어였지만 그건 매우 흥미로웠죠.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신념에 반하는 일들을 계속 해왔던 거죠. 과거에는 ‘진보’라는 걸 믿었어요. 지금은 전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영화에서 촬영 결과물들은 매우 아름답고 깨끗하고 진짜같죠. 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지루하고 시시할 뿐입니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영화를 보고 있을 때 그 화면에 지루함을 느낄 수 있어요. 요새는 가장 완벽한 영화가 가장 지루한 영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초기 영화에서의 스릴 넘치는 그 화면의 질감을 어떻게 설명할 거냐는 거죠. 

 

 - 2012.11.22 한글로 옮겨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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