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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아프길래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잠시 왔다갔다하다
이제 거울을 보니 눈이 빨갛다.
랩탑을 닫고 방의 불을 끄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밤인데, 어둠 속을 달리면 조금 나아질까 옷을 갈아입고 달리러 나간다.
번화가가 아닌데도 동네는 너무 눈이 부셔
은은한 달빛만 어둠을 감싸는 공간을 그리워하며 더 어두운 곳을 찾아 달린다.

얼마나 달렸을까 왼쪽 허벅지에 통증이 느껴졌다. 
낯설지 않는 통증에 장경 인대 마찰 증후군이라는 진단명을 기억해 낸다.
Iliotibial Band Syndrome. 
신드롬이 원래 이렇게 쓰이는 용어구나, 하고 생각했었지. 

집으로 천천히 걸어 돌아와 씻은 후 
방 바닥에 옆으로 누워 병원에서 오래 전에 배웠던 스트레칭을 반복한다. 

몇 번을 뒤척이고 일어나 거울을 보니 충혈이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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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 delon

 

   최근에 어디선가(아마도 영화관이었을텐데) 지나가는 소리로 “요새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랭 들롱을 알지?”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 속에 앨범 커버 한 장이 바로 떠올랐다. The Smith의 [The Queen is Dead] 앨범. 지금이야 ‘알랭 들롱’하면 <레오파드>에서 서서히 질식해 가는 얼굴이나 <사무라이>에서의 암살자의 고독함이 먼저 떠오르지만, 내가 알랭 들롱이라는 배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The Queen is Dead] 앨범을 구입해 그 ‘앨범 속지’를 펼쳐보고 난 후였다. 

   ”원래 이앨범의 제목으로 내정되었던 것은 ‘여왕은 죽었다.’가 아니라 ‘마가렛을 단두대로(Magaret On The Guillotine)’였지만 모리세이는 대처수상에 대한 오랜 혐오의 이 곡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고 해서 지금과 같은 제목으로 수정되었다.(‘Magaret On The Guillotine’은 나중에 모리세이의 솔로 앨범 ‘Viva Hate’에 실려 영국내에서 한바탕 곤욕을 치르기도)’여왕은 죽었다’는 하버트 셀비 주니어의 유명한 소설’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 인용된 구절이고 이와 매치된 앨범 재킷은 알랭들롱의 얼굴, 또한 초판 부클릿에는 제임스딘의 사진까지 삽입되어 모리세이스타일 아트 수법의 전형을 엿볼수 있는 좋은 예를 제공하고 있었다.(모리세이는 옛 티비/영화물의 대팬이자 제임스 딘의 추종자이다.)…… 95.11.14 성문영(HOT MUSIC)”           thanks to onthesidewalk.com

   국내 라이센스는 95년에 발매된 모양인데, 내가 이 앨범을 구입한 건 99년. 결국 이것도 다 Radiohead 때문… 라디오헤드 멤버들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뮤지션으로 언급되는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가 스미스였기 때문에 스미스 음반을 구해 들어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숙제였다. 여러 음악잡지에서 스미스 음반 중 [The Queen is Dead]를 가장 명반으로 소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구입했던 기억.
  스미스 그리고 알랭 들롱뿐만 아니라 재즈(찰스 밍거스)를 처음 접하게 된 것도, 현대 음악(펜데레츠키)을 접하게 된 것도 다 라디오헤드 때문이다. 아, 배우라면 한 명이 더 있다. 드니 라방! <나쁜 피>와 <퐁네프의 연인들> 보다 먼저 드니 라방을 만난 것이 Thom이 피쳐링했던 Unkle의 곡  ”Rabbit in your headlights” 뮤직비디오였으니. 오랜만에 I’m a rabbit in… your headlights…

  

  

…장률 감독님께서 이번 학기 첫 수업시간에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펑꾸이에서 온 소년>을 보여주셨는데, 영화 속 소년들이 몰래 극장에 들어가 봤던 영화가 비스콘티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이었던 것 같다. 알랭 들롱의 얼굴이 한 컷, 아주 잠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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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시작되고 해원이 그녀의 엄마와 사직공원을 걷는다. 나는 2012년의 어느날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날 나는 종로도서관을 방문해 어떤 책을 빌렸거나 혹은 반납을 했고, 도서관을 나와 사직공원 입구 즈음에서 ‘이제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중에 경복궁 방향에서 내 쪽을 향해 걸어오던 한 남자를 바라보게 되었다. 홍상수 감독이었다. 녹색 패딩을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닐 수도 있다. 옷차림이 두꺼웠던 것은 확실하다. 계절은 아마도 늦겨울, 초봄이 아니었나 싶다. 두 명의 여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아직 멍하니 서 있었고 세 사람은 사직공원 쪽으로 걸어간다. 공원 앞에 파룬궁을 홍보하는 패널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앞에 서서 잠시 그 홍보물들을 바라보다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멈춰 서지 않았을 수도 있다. 로케이션 헌팅 때문에 사직단에 왔나보다 생각했다. 두 여성은 함께 일하는 영화 스탭일 것이다. 그들의 뒤를 따라 사직 공원으로 들어갔다. 나는 공원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멈춰섰다. 그냥 빨리 학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그때 그 사진을 확인하고 싶어서 폰 사진들을 옮겨놓은 하드디스크를 뒤져 본다. 사진이 많아서 쉽게 찾기 힘들다. 당시 날짜를 가늠하기 위해 종로도서관 홈페이지, 정확히는 서울시교육청 평생학습관/도서관 시스템에 로그인 해 대출/반납 기록을 살펴본다. 총 대출 자료수는 105권으로 나오고 검색 첫페이지에는 검색 결과가 10건 밖에 안 나오는데 뭔가 오류가 있는지 검색결과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아 다른 대출/반납 기록은 조회를 할 수가 없다. 확인 가능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2012년 4월 25일에 대출해 5월 18일에 반납한 [우리 안의 과거]. 4월 말에 패딩을 입었을리 없다. 그날 나는 ‘우연히 홍상수를 보았다’는 내용의 트윗을 작성했었는데, 몇 시간 후에 지워버린 기억이 있다. 트윗을 삭제하지 않았다면 그 날이 정확히 몇일이었는지 알 수 있을텐데. 영화의 크랭크인 날짜를 검색해 본다. 3월 15일. 헌팅은 그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정도의 내용을 단서로 사진을 찾아본다. 사진을 찾을 수 없다. 아마 사진을 찍지 않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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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읽었던 책들에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이 동원되더라도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 기껏해야 그 명칭을 바꿀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노예 상태보다 더 교활한 것이기에 더 나쁜 형태들의 노예 상태를 나는 상상할 수 있다 : 인간을 어리석고 불만 없는 기계 같은 것으로 변화시켜, 실제로는 노예처럼 지배를 당하면서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게 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거나, 인간적인 즐거움과 여가를 보내는 오락들을 인간에게서 배제하고, 만족들이 가지고 있는 전쟁열만큼 광적인, 일에 대한 취향을 인간에게 키워 주거나 하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 혹은 상상력의 노예 상태보다는 나는 여전히 우리의 사실상의 노예 제도를 택하겠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입을 빌어, 고대 로마제국의 노예 제도보다 “더 나쁜” 형태의 노예 제도를 상상한다. 이 가상의 “노예 상태”는 지금 현대 사회 시스템과 유감스럽게도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전쟁열만큼 광적인” 스펙타클의 희열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은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스펙타클의 풍요 속에서 수행되는 허위적인 선택은 공허한 특질들을 둘러싼 투쟁으로 전개된다. 이 투쟁은 양적이며 사소한 것들에 대한 충성을 고무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것은 허위적인 해묵은 대립, 지역주의, 인종주의를 소생시키며, 이런 반목들은 소비의 천박한 위계서열들을 터무니없는 존재론적 우월성으로까지 끌어 올린다. 이런 식으로, 경쟁적인 스포츠에서 선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끊임없는 사소한 대결들이 가소로운 이해관계들을 동반하며 거듭 설정된다.
   풍요한 소비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주로 청년과 기성세대 사이의 스펙타클적 대립이 허위적인 역할들 중에서도 맨 앞에 등장한다. 이것이 허위적인 까닭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서의 기성세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가 이미 1960년대에 목도한 “스펙타클의 풍요”로움은 여전하다. 아니 그 “공허한” 투쟁은 양적인 면에서 60년대에 비해 엄청난 수준으로 증가했다. “경쟁적인 스포츠에서 선거에 이르기까지”. 그의 서술은 마치 디씨인사이드와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게시판을 관찰하고 기록한 감상문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오래 전에 향유하던 “인간적인 즐거움”을 잃고 이제는 모니터 앞에 앉아 끊임없이 그들이 인터넷에 의견을 남기고, 댓글을 달아댈 ‘사건’들이 터지길 기대한다.    

   자유처럼 느껴진 것이 실제로는 전혀 자유가 아니었을 가능성,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이 ‘객관적’으로 결코 만족스럽지 않은 것임에도 이에 자족할 가능성, 노예제도 속에서 살면서도 자유롭다고 느끼고 자신을 해방할 그 어떤 급박한 필요도 느끼지 않게 되어 참된 자유를 누를 가능성을 저버리거나 박탈당하게 될 가능성에 관한 것…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 근대]

   늘 바쁘게 지내는 편이다. 쉴새없이 해야할 일들이 솟아난다.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어있음을 느낀다. 확실히 나도 시스템의 노예로서 충실히 복무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노예임을 깨달은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바쁨’을 기준으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가의 여부를 가릴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시스템이 만들어낸 덧없는 목표들에 매몰되어 있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퇴사를 결정하면서 이미 러닝 트랙에서 한 번 벗어나긴 했지만, 이후 다른 트랙에 (좀 더 의지적으로) 다시 진입한 덕분에.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은 계속 바쁘게 지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공허한 특질들을 둘러싼 투쟁”이 아닌 다른 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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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e? : Comment le cinéma est devenu le plus singulier des arts

이정하 선생님이 번역한 자크 오몽의 [영화와 모더니티]에서,
“자크 오몽과의 인터뷰”
(2008년 2월 17일, 19일, 인터뷰어 이정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이며, 영화는 시각예술이고, 영화 이미지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미지가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지의 형상화 작업이라는 것(후에 ‘형상성figural’이라 부르게 된 것)이 이 책(끝없는 시선L’oeil interminable)의 미학적 테제이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에 일반적으로 흥미를 가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 ‘이미지로서의 사고’ 혹은 ‘시각적 사고’의 창조이다. 이것은 이야기가 허술하거나 말도 되지 않는 영화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아주 창조적인 이야기체를 보여주는 영화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왜 시각적 소여인가. 나의 가설은, 이 시각적 소여들이 우리에게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주어진 것들은 이야기체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통해 관객에게 ‘작용’한다… 

…만약 이야기가 흥미롭다면 대체로 사람들은 먼저 이야기에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다른 것들에 주목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 교육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자발적으로 주목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이야기의 망각이라는, 특수한 작업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이야기를 거의 다 잊어버리기까지 하면서… 가능한 한 바라보기 위해…
…영화를 볼 때, 형상 혹은 일반적인 인간 형상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아주 많은 흥미로운 것들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다. ‘분석’은 영화에서 흥미롭다고 판단된 형상적 요소들을 포착하는 것인데, 이것이 흥미로운 것은 일반적인 미메시스의 관점에서 투명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델과 닮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형상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바로 거기 현재한다. 기형화, 예기치 않은 제스처, 의외의 색채, 흐릿함 등 이미지를 흥미롭게 만드는 수없이 많은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모두 형상의 작업으로서 현전한다는 것에 일치한다…
…영화에는 이야기의 진행에 반드시 본질적이지 않음에도 거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상들이 있다. 이것이 형상성이다. 형상성이란 무엇인가. 이미지 내에 무언가가 현전하는 순간, 즉 단순히 미메시스적 관점에서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이유를 알 수 없이 그대로 거기 현재하고 있는 것이다. 모호하고 수수께끼와도 같은. 우리는 바로 여기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영화가 시각예술이라는 관점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영화에서 무언가를 재현하는 일에 쓰이는 것이 아닌 것에 흥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작업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가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항상 있어 왔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영화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점에 나는 동의한다. 영화는 복합적인 현상이다. 영화는 매우 복잡한 사회적 현상으로서, 다른 예술과는 달리, 홀로 시를 쓰거나 – 물론 주변부에서 홀로 시적인 영화를 만들 수는 있다 – 소수의 감상자를 위한, 혹은 소수의 재력가의 소비 대상이 되는 그림들을 그릴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자금의 회수와 다수의 관객을 요하는 산업이다. 영화의 경제는 민주주의의 경제이며, 당연히 다수의 대중의 관심을 촉발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시각예술로서의 영화라는 생각은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영화는 의도치 않게, 다시 말해 그렇게 되려 한 적이 없이 시각적인 예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기획이 시각예술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영화의 기획은 오히려 서사예술이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돈을 벌거나 관객을 끌어들이거나 다른 영화를 만들거나 하는 일, 즉 영화를 사회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 곧 ‘산업’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각예술이라는 생각이 많은 대중을 끌어 모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기 위해 영화관에 오는 관객은 사실상 극소수다…

당신이 이미지를 바라보지 않는다 해도 이미지는 당신에게 작용한다. 결국 영화는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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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요

11월 3일, 영상자료원에서 ‘최시형’ 감독의 <경복>을 보고 왔다. 뭐랄까, 그냥 이성의 끈을 모두 풀어 놓고 굉장히 편안한 상태에서 관람을 하고 나왔다. 아, 신이수 형님의 깐죽거리는 연기는 정말 일품이었다(올해 인디포럼은 일이 많이 겹쳐서 영화를 보러 갈 수 없었는데 딱 하나, 신이수 감독의 <너에게 간다>가 포함된 섹션은 보고 왔다. 우리들의 절름거리는 로맨스, <너에게 간다> 나이스).

<경복>에서는 어느 순간, “정은임의 영화음악”이 흘러나온다. 정은임 그리고 정성일의 목소리. 정은임 아나운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무 농도가 진한 말들을 하기 때문에, 가끔 체하는 느낌”을 들게할 정도의 그 감정선을 가지고 정성일은, 지아장커가 <임소요>를 만들게 된 스토리를 들려준다. 나는 그 방송을 기억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정은임의 영화음악 팟캐스트를 뒤져보니 그것은 2004년 1월 21일에 방송된 내용이었다. 내가 이제 막 신병 티를 벗기 시작할 때 쯤, 라디오를 마음 놓고 들을 수 있게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들었던 방송. 구정 연휴가 시작될 때라 부담없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 방송을 기억하는 건 이 방송 때문에 나중에 임소요를 찾아 보았기 때문이다. <소무>, <플랫폼>, <임소요>를 모두 군인 신분일 때 보았다. 

전역하고 처음으로 맞이했던 겨울, 볼빨간씨가 진행하던 원음방송의 “한밤의 음악여행”에 애청자로 출연했을 때, 내가 선곡한 노래를 틀어놓고 볼빨간씨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정은임씨 얘기가 나왔었다. 볼빨간-서유다 형님도 워낙에 라디오 매니아이시기때문에… 정은임 아나운서의 존재는 우리 둘에게 매우 각별한 것이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우리가 방송을 함께 했던 그 원음방송 방송국 바로 앞이 정은임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곳이다. 방송을 끝내고, 그 사고 장소에서 잠시 서성이다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 

뭐, 그냥 그랬다는 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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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키지의 [시각에 대한 은유들로부터]로부터

 

    Bart Testa는 <The Act of Seeing With One’s Own Eyes>(이하 the Act)를 아방가르드 다큐멘터리로 정의하고 ‘보여주기’가 아닌 ‘보기’의 영화화를 구현한 사례로 소개했다.1) 테스타는 ‘보여주기’의 사례로 Franju의 <짐승의 피>를 예로 들며, 이 영화가 “도축 이미지의 잔인함”을 보여줘 관객에게 불편함을 안겨줌과 동시에 윤리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무덤 속에 있는 프랑쥬가 매우 서운해할 만한 분석이다. 물론 윤리적 차원에서 현대인의 무감각함에 대한 고발의 목적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프랑쥬가 ‘보여주려’ 했던 것은 그것 이상이었기 때문에. 
   테스타는 <짐승의 피>를 ‘보여주기’의 예로 들며, <the Act>를 그와는 다른 ‘보기’의 영화로 설명했다. 그는 ‘보기’의 영화를 정의하길, 특정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장치들을 제거하고, 그래서 어떠한 해석의 여지도 주지 않는 영화라고 말하는데 나중에 가서는 <the Act>가 부검 행위를 신비스럽고 제의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라고 분석한다. 순수한 보기의 영화라면 그것이 어떻게 신비스러울 수 있고 제의적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단지 뻘겋고 하얀 색들이 뒤섞여 있고 누군가 무엇을 자르고 뜯어내는 영상일 뿐이다. 결국 <the Act>가 하나의 영화로 구성된 이상 순수하게 보는 행위 그 자체를 가능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었을 것이다. 불가능하지만 그것에 도전한 스탠 브래키지의 시도는 탁월해 보이나 테스타의 분석은 미흡하다.  

   스탠 브래키지의 글, [시각에 대한 은유들로부터]를 읽고 <the Act>를 다시 생각해 본다. “지각에 관한 인위적인 원근법에 지배되지 않는 눈”,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눈”, “모든 사물의 이름에 반응하지 않고 지각의 모험을 통해서만 알아내는 눈”. “‘녹색’을 의식하지 못한 채 풀밭을 기어가는 아이는 무수한 색깔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브래키지 본인의 언명을 적극적으로 시도해보고자 한 작품이 <the Act>라고 생각된다. 그는 시체 부검 장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가 포착한 이미지 다발을 그저 ‘볼 것’을 요구한다. 그의 의도대로라면 장소도 사건도 휘발된다. 무언가 움직이는 게 있고, 흘러내리는 것이 있고, 분리되는 것이 있고, 명도와 채도가 다른 색들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에 브래키지는 그 색감에 대한 탐구를 위해 7가지 종류의 필름을 사용했다.2)  

   <the Act>를 보면서 처음에는 조금 괴로웠으나 이내 감정을 다스리고 두 눈을 부릅뜨고 볼 수 있었다. ‘순수한 시각’은 그것을 상상할 수 있고, 시도해 볼 수는 있지만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수 년간 잔혹한 영상을 보면서 어느 정도 강도가 센 장면에 학습이 된 측면도 있고, 이성적으로 ‘이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라고 계속 주문을 외웠기 때문에 <the Act>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영화 속의 부검의들 그리고 실제 우리 주위에서 오늘도 십수 건의 외과 수술을 집도하고 있을 의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이 ‘순수한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은 아니다(수술대 앞에서 오히려 그들의 시각은 그 누구보다도 정교하다, 정교해야만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개교기념일에 조조로 <이벤트 호라이즌>을 보러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빨간 색의 벽으로 둘러싸인, 텅 빈 상영관 한 가운데에 앉아 스크린을 서서히 채워가는 피의 물결을 보고 있던 그 순간이 유난히 괴로웠고 차마 눈을 뜨고 계속 보기가 힘들었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왜 내가 신체의 훼손과 피의 물결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 적잖이 고민했었다. 그런 감정은 학습에 의한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갓난 아이가 호러 영화를 보고 공포를 느낄 수 있을까? 풀밭에서 ‘녹색’이라는 색 개념을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라면 두개골을 절개하는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브래키지가 <the Act>에서 부검 장면을 촬영 소재로 사용한 것은 그것이 누가 보아도 견디기 힘든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극도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큰 장면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가 논하는, 어떤 지각이나 감정이 제거된 ‘순수 시각’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이쯤하니 ‘순수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녹색’을 의식하지 못한 채 기어가는 아기에게 풀밭에 무슨 ‘색깔’이 있겠는가. 그저 무수한 반사광들이 망막에 맺힐 뿐, 아기에게는 ‘색깔’이라는 개념도 없기 때문에 그저 무언가 보일 뿐이지 않을까. 브래키지가 상상한, 아기가 풀밭에서 무수한 색깔을 감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기가 아니라 카메라에서 가능한 것이다. 기계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차원에서 브래키지의 상상을 구현한 모델은 (현실에서는 존재 불가능한) ‘기억의 천재’ 푸네스다.3) 그에게 ‘녹색’은 없다. 모든 것이 그대로 지각되고 기억될 뿐이다.
   두려움과 공포의 감각은 학습된 측면이 있지만, 본능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아이가 풀밭이 아니라 시체더미 위를 기어가고 있다면… Herz Frank의 <10 minutes older>를 보면 꼬마 아이들이 그 아름다운 눈망울로 무언가를 계속 바라보며 울고 웃기를 반복한다. 그 아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보고 어떤 기제로 인해 그런 표정을 짓게 되었을지, <the Act>를 보고나니 더욱 궁금해 진다.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정보와 학습된 기쁨과 두려움, 어느 쪽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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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art Testa, “Seeing With Experimental Eyes” in Documenting the Documentary, ed. Grant and Sloniowski [Detroit: Wayne State University, 1998]
2) “The rhythm reflects directly my feelings, my movements, my heartbeat, my aversion at times. In this case, I use seven kinds of film, EF daylight, EF tungsten, [Ektachrome] MS, Kodachrome tungsten, Kodachrome daylight, commercial Ektachrome . . . plus two filters, plus three light sources.” Stan Brakhage at Millenium, Millenium Film Journal 47-9. 2007-8
3)  ”그는 <개>라는 종목별 기호가 다양한 크기와 형상들을 가진 상이한 수많은 하나하나의 개들을 포괄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그는 (측면에서 보았을 떄) 14의 3에 있는 개와 (정면에서 보았을 때) 4의 3에 있는 개가 왜 똑같은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 골머리를 앓았다.”  보르헤스 [픽션들]. 기억의 천재 푸네스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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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ri

Jiri

Jiri

Jiri

2012.08.21. 아부지와 함께 지리산 등반.
천왕봉에 도착하자마자 폭우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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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respondance

Correspondencia     Correspondence
          Correspondance
               꼬레스뽕당스, 교감?

   호세 루이스 게린(Jose Luis Guerin)이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에게 보내는 “영화-편지”에는 호세 루이스 게린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창문에 반사된 모습이나 그림자로 등장할 뿐이다.  요나스 메카스는 스스럼없이 그의 주름지고 검버섯핀 얼굴을 카메라 앞에 들이댄다. 게린의 얼굴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메카스의 영화-편지에서 발견된다. 메카스가 오래된 필름 슬라이드를 살펴보는 장면에서, 그가 아마도 지금 게린의 나이 정도였을 무렵에 찍혔을 법한 필름이 카메라에 잡힌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작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주름이 없는, 젊은 요나스 메카스의 얼굴. 그 안에서 지금 호세 루이스 게린의 얼굴을 본다.

   [서신 교환]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글에서 유운성 평론가는, 앙트완 베르만과 폴 리쾨르를 경유해 “영화-편지 교환은 모놀로그의 씁쓸함 속에 갇히지 않고 낯선 것이 주는 시련을 통해 스스로의 낯섦을 깨닫기 위한 ‘언어적 환대’(linguistic hospitality)로서의 번역과 유사한 것”으로 설명한다. 환대. 알랭 그르니에는 그의 아버지 쟝 그르니에가 조르쥬 뻬로스라는 청년에게 보낸 답신에 대해, 그것은 “환대하는 내용이기는 하나 간결하며 신중”(Geroges Perros-Jean Grenier, Correspondance[1950~1971])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다소간의 긴장감이 서려있는 환대. 때때로 침묵하는 스크린. 

   아래 편지글은 또 다른 환대. 내게도 힘을 주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작가 지망생 프란츠 카푸스에게 보내는 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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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1908년 성탄절 다음 날.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의 아름다운 편지를 받고 내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당신은 아십니까? 당신이 주신 소식은 현실적이고 명백해서 좋은 소식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오래 생각할 수록 그 소식이 실제로 좋은 소식이라는 느낌이 더 강해집니다…  이번 성탄절 휴일 동안 나는 자주 당신 생각을 했고, 큰 남풍이 산을 한꺼번에 집어삼킬 듯이 불어닥치는 텅빈 산과 산 사이에 있는 쓸쓸한 요새 안에서 당신이 얼마나 적막할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직함과 제복과 업무, 잡을 수 있고 제한된 이 모든 것들은 그 수가 많지 않은 고립된 부대원들과 함께 있는 그런 환경에서는 진지함과 필연성을 띠게 됩니다. 그것은 군인이라는 직업상의 유희적인 요소와 시간보내기를 넘어 주의 깊은 응용을 의미하며, 독자적인 주의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런 주의를 갖도록 교육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때때로 위대한 자연의 사물 앞에 세워놓는 상황 속에 우리가 있고, 그 상황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가 필요한 전부입니다.

   예술도 살아가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가면서 모르는 사이에 예술을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비현실적인 얼치기 예술적 직업에서보다는 모든 현실적인 일 안에서 예술에 더 가깝게 이웃해 있습니다. 그런 직업은 예술에 가까운 체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예술의 현존재를 부인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그 안에 빠져드는 위험을 극복하고, 어디선가 거친 현실 속에서 고독하고 용감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다가오는 해가 당신을 그런 상태로 지켜주고 더 힘을 주기를 바랍니다. 

변함없는 당신의 R. M. 릴케
([릴케의 편지], p.93~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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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여름 ‘시네바캉스 서울’에서는 [서신 교환] 섹션의 영화 3편만을 감상했다.
   라쿠에스타-가와세(8/2), 게린-메카스(8/14), 에리세-키아로스타미(8/26). 빅토르 에리세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서신 교환’은 시네바캉스 마지막 상영작이었다. 요새 한창 편집 중인 작업이 있는데, 서신 교환을 보고나면 작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역시 혼란스러웠던 머리 속이 맑아지는 느낌. 이런저런 메모들. 간간히 들리는 노작가들의 육성에 특히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었다.

   집에 돌아와 별 생각 없이 ‘서신’에 대한 글을 찾아 인터넷을 잠시 헤메다 문득 ‘김현’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라면 분명 누군가와 서신을 통해 속 깊은 대화를 나눴으리라. 나는 문학(계)을 잘 모르고, 김현 선생님도 잘 모르지만(아마도 사숙할만한 다른 문인들이 또 많이 있을 것이다) 군복무 시절 [두꺼운 삶과 얇은 삶]을 처음 읽고 이후 선생의 글을 계속 찾아 읽은 연유로, 사색의 산책로를 소요할 때마다 자주 선생의 문장과 마주친다. ‘김현’과 ‘서신’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해 검색했더니 이인성 작가가 김현 선생의 서신을 소개하는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77. 9. 8.’이라는 날짜가 적혀있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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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성 군에게,

   오늘 편지 받았소. 요즈음엔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을 번역하고 있는데, 거기에 그런 귀절이 있었소. 베르렌느의 “저 지붕 위로 하늘은 얼마나 파랗고 고요한가”라는 詩行을 인용한 뒤에, 감옥에서(!) 쓴 것에 감탄하고 나서, 바 先生 말씀이 혼자 있을 때는 누구나 감옥에 있지 않은가 라고. 그럴듯한 말 같았소. 인성이가 그리워하는 것에서 떠나 있다고 생각할 때, 누구나 사실은 그러리라고 생각한다면, 고독하다는 것도 그리 절망적인 것은 아니리라 생각하오. 중요한 것은 산다는 것, 그리고 산다는 것이 작가에게는 말과의 싸움이라는 것(그 말 속에는 말을 만들어낸 무수한 묘상이 숨어 있을 것이오)을 깨닫는 일이 아닌가 하오. 가짜로 살고 가짜로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마시오. 그 순간에 아픔은 말이 되어, 아픔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오. 삶 속에서 그 아픔의 등가물을 찾도록 애를 써보시오. 하하, 이러니까 수신교과서를 쓰는 것 같소. 소설은 좀 잘 써지오? 소설을 쓰시오. 그러면 조금은 아픔을 아픔으로 느낄 수가 있을 것이오. 갈수록 나는 개새끼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오. 삶이란 게 개새끼가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면 그 삶이란 것도 참 한심할 것이오. <한국문학의 位相>을 끝낸 후에, 약간은 허탈감에 빠져 있었는데, 요즈음은 바 先生 번역을 시작했소. 일요일 쯤 심심하면 놀러오시오. 소주나 한 컵 합시다.

                                                                                                 김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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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선생님 홈페이지 www.leeinseong.pe.kr, ‘골방의 낮은 숨결’ 게시판에서 발췌) 

 

   바슐라르를 ‘바 先生’이라 칭한 것을 보고 크게 웃었다. 바 선생!  아,
   가짜로 살고 가짜로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마시오. 그 순간에 아픔은 말이 되어, 아픔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오. 삶 속에서 그 아픔의 등가물을 찾도록 애를 써보시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갈수록 나는 개새끼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오. 삶이란 게 개새끼가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면 그 삶이란 것도 참 한심할 것이오. 

   소주나 한 컵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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