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__-__.__

생각하는 시간-

 

 

지난 주에는 학부 수업 기말 시험 감독을 한 번 들어갔다. 수업명은 ‘사이버커뮤니케이션’. 원래 언론학 대학원생들이 맡는 수업이었는데, 감독 인원이 부족해 영상학 조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래서 내가 감독을 들어가게 되었다. 문제지와 답안지를 가지러 언론학 학생회실에 가니, 나와 함께 시험을 진행할 언론학 조교 한 분이 미리 필요한 것들을 다 챙겨갔다고, 그냥 시간에 맞춰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그 곳에 있던 조교분이 설명해 주었다.  

  강의실에 도착하니 시험 진행을 맡은 언론학 조교분이 답안지 갯수를 세어보고 있었다. 아는 분은 아니고, 그냥 지나가며 몇 번 보았던 얼굴이다. 인사를 드리니, 그냥 앉아 계시기만 하면 되요, 하고 인상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크지 않은 키에 선한 얼굴, 뿔테 안경에 두툼한 울 스웨터를 입은 모습이 학부생들 보다 오히려 더 학부생처럼 보이는 분이었다. 

  시험 시작 10분 전인데, 이미 대부분의 학생들이 미리 자리를 잡고 무언가를 열심히 외우고 쓰고 있다. 나는 강의실 뒤로 걸어가 감독용으로 끝에 빼어 놓은 책상 위에 걸터 앉았다. 그래도 시험 시간동안 가만히 있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언론학 조교분에게 여분의 답안지를 챙겨 다시 뒤에 있는 감독석으로 돌아왔다. 시험 중에 답안지를 더 요청하는 학생들 중 강의실 뒷편에 앉아있는 학생들에게는 내가 답안지를 챙겨 줄 생각이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강의실에는 정적이 흐른다. 빌링슬리관은 오래된 건물이다. 이 강의실에는 어느 구석이나 천장에 온풍기가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아, 난방은 오직 정해진 시간이 되면 작동하는 ‘라지에이터’에 의존해야 한다. 마침 ‘라지에이터’가 작동하는 시간이라 쇠파이프 사이로 새어 나오는 증기 소리, 파이프가 증기의 압력에 움찔댈 때마다 들리는 둔탁한 소리가 이따금씩 강의실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하지만 정적을 감지하는 것도, 그 정적이 어떤 소음에 상처 입는 것도 시험 감독인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70여명의 학생들은 모두 책상 위에 고개를 푹 숙인채 빠른 손놀림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같은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몰두해 시험 답안을 적어 내려가는 학생들과 그들의 구부린 등허리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생각이 아주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놀랍고 조금은 쓸쓸했다.   

  100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스마트폰을 에어플레인 모드로 바꾸고 그냥 내 앞에 이 생경한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기로 한다. 들리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기로 한다. 그러면 무언가 또 재미있는 생각들이 떠오를 것이다. 절대 지루할 수 없는 시간이다. 

  쓰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한다. 노트 필기보다 랩탑을 두드리는 것에 더 익숙한 세대들. ‘사이버커뮤니케이션’이라는 수업을 수강했던 이 학생들이 ‘아직’ 필기로 시험을 치뤄야 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저렇게 긴 답안, 그러니까 장문의 글을 랩탑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필기했던 것이 내게는 매우 오래 전 일이다. 정기적으로 장문의 글을 필기해야 하는 학부생들의 ‘손’이 어쩌면 지금 나의 손보다 훨씬 감각적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수감 중이던 친구에게도, 나는 손편지가 아닌 전자우편을 보냈었는데(교도소에는 전자우편 내용을 출력해 제소자에게 전달하는 서비스가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손편지 대신 전자우편을 보낸 것을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후회하고 있다. 

  그래서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의 연쇄를, 내용뿐만 아니라 손글씨라는 메시지 전달 형식 때문에 더 반갑게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공들여 무언가를 직접 손으로 쓴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캠퍼스에서 더 많은 손글씨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실은 계획하고 있는 작품 중 하나가 ‘쓰는 행위’에 대한 에세이 영화(?)인데 어쩌면 이 대자보들의 등장이 주요한 모티프가 될 수도… 그런데 아직 생각 뿐이지 정말로 기약이 없다. 

 

  한두 명씩 학생들이 자리를 뜬다. 학생들이 떠난 책상 중 몇몇에는 지우개 가루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지우고 다시 쓴다는 것. 흔적이 남아있는 글쓰기. 학생들이 남아있던 흔적으로서의 지우개 가루. 비뚤어진 책상과 의자. 책상 위의 낙서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샤프심 한 개. 또각거리던 소리들. 아주 낮은 탄식. 기지개 켜는 소리.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수고하셨어요. 어느 겨울날 오후… 

 

 

 

0 comments
Submi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