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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Lisandro Alon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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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러한 형식 분석의 가능성을 노엘 버치는 한두 편이 아니라 수많은 영화 속에서 순전히 경험적인 방법으로 찾아냈다. 그는 이 많지 않은 분량의 저작에서만도 200편에 가까운 영화를 언급하고 있는데, 비디오테이프도, DVD도, 인터넷도 없었던 시대에, 수많은 꽃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꽃가루를 모으는 꿀벌처럼, 영화관에서 만난 수많은 영화들에서 실험과 혁신들을 하나하나 수집해서 장대한 풍경을 펼쳐 보인다…”

[영화의 실천], ‘옮긴이 해제’ 중에서.

 

   드디어(!) 이윤영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영화의 실천]이 출간되었다. 작년 1학기, [영화의 실천] 영역본을 텍스트로 강의하시면서 매 챕터, 직접 번역하신 내용을 학생들에게 나눠주셨었으니, 이미 한 번 이상 번역을 완료한 텍스트를 또 1년 이상 다시 검토하신 셈이다. 책을 받자마자 그 문제의(?) ‘개정판 서문’, 내가 발제를 맡았던 5장의 내용 그리고 옮긴이 해제부터 먼저 읽어보았다. 서평은 뒤로 미루고… 그런데 옮긴이 해제, 그 중에서 위에 소개한 부분을 읽다가 고개를 갸우뚱. ‘꽃가루를 모으는 꿀벌’이라니, 꿀벌은 꿀을 모아서 꿀벌 아닌가? 검색을 해 보았더니 꿀벌은 꿀 뿐만 아니라 꽃가루 역시 모은다고(생물 시간에 많이 맞았던 게 다 이유가 있다). 꽃가루는 꿀벌에게 매우 중요한 식량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선생님 덕분에 난데없이 생물 공부를 하고나니 마침 최근에 극장 스크린에서 만났던 또 다른 꿀벌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파리 국립 오페라 발레단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 <La Danse>. 무용을 다룬 영화라는 점보다 Fredrick Wiseman의 영화라는 점 때문에 궁금증을 못 참고 잽싸게 보고 왔다. 역시나 단지 ‘무용’과 ‘무용수’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댄스 씨어터를 구성하는 다른 많은 물질적, 비물질적요소들에 또한 주의를 기울인 다큐멘터리라 (이제 새롭지는 않지만) 흥미로웠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양봉’씬. Palais Garnier 안에만 머물던 카메라가 갑자기 옥상의 풍경을 비추는데, 거기에는 한 남자가 양봉 작업을 하고 있다. 얼마간 꿀벌들과 bee-keeper의 풍경을 관찰하던 카메라는 그리고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오페라 극장 지붕 위의 양봉 장면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증을 가졌던 모양이다. 영화가 처음 공개되었던 2009년 당시의 기사 몇 개를 찾아보니 그 장면이 꽤 자주 언급되어 있는데, 정작 와이즈먼은 그 장면에 대해 별 말이 없었다. [Film Forum]에서 진행했던 인터뷰에서는 양봉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http://www.filmforum.org/more/podcast_archive). “그 극장 지붕 위에 꿀벌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거기서 나온 꿀을 극장 샵에서 진짜 판매하고 있는데 장사가 영 시원치 않은 것 같더라구요. 그 장면을 보여주면 꿀 파는데에 좀 도움이 될까 싶어서… (웃음)

  와이즈먼의 대답은 농담이었지만, 거기에는 진심이 묻어있다. “I wanted to show that there were bees on the roof of the Paris Opera Ballet”… ‘거기 있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 자체가 그의 작업이다. 그런 차원에서 무용수들이 몸을 움직이는 장면과 비키퍼가 양봉작업을 하고 있는 장면에는 위계가 없다. (어떤 평론가는 양봉씬을 두고, 안무가, 무용수들이 발레단 디렉터 Brigitte Lefèvre의 카리스마 하에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여왕벌과 일벌의 구도로 빗댄 명백한 은유라고 쓰기도 했는데, 이는 과도한 해석으로 보인다.)

  영화 한 편 더. Lisandro Alonso의 <Los muertos>. 별다른 플롯이 존재하지 않는 이 영화는 ‘바르가스’라는 인물이 감옥에서 출소한 후 그의 딸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에는 ‘충격적인’ 영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르가스가 고목에 연기를 피워 커다란 벌집을 통째로 채집해 꿀을 빨아먹는 장면이다. 알론소도 와이즈먼처럼 관객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바르가스는 와이즈먼의 카메라처럼 문득, 그러나 태연하게 벌집을 통째로 나무 속에서 빼내어 챙긴다(그리고 또 염소의 배를 가른다). 감독의 그런 천연덕스러움이 ‘왜 당신은 이 장면(영화)을 통해 충격 혹은 당혹감을 느끼는가’라고 묻고 있는 듯 하다. 이미 어떤 ‘영상 문화-문법’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들, 마트에서 말끔하게 포장되어 있는 꿀단지만을 구매해 본 사람에게 알론소가 보여주는 세계는 너무 낯선 것이다. 그런데 그 세계는 외계에서 갑자기 침입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 우리가 잊어버린 과거이고, 돌아볼 여유없이 폐기해버린 ‘가능성’의 흔적들이 아닌가…

  노엘 버치는 정말 “꿀벌처럼” 수많은 영화에서 꽃꿀과 꽃가루를 모아 이것을 토대로 [영화의 실천]을 썼다(이윤영 선생님의 감탄처럼 “비디오도, DVD도,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 버치의 아카이빙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는 적지 않게 발견되는 버치의 ‘인용 실수’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실천]이라는 벌집 속에서 가장 달콤한 꿀이 들어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IMR이 아니라 PMR(Primitive Mode Representation, 원시적 재현 양식)이 숙성된 부분일 것이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와이즈먼의 영화도, 알론소의 영화도 모두 이 ‘원시성’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다. 관객들을 스펙터클 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영화가 아닌,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의 바깥”에 관객들을 위치시키는 영화들. [영화의 실천] 속에서 버치는, 관객을 “멀리 있는 관찰자”로 만드는 영화 목록을 쌓아갔다. 그리고 이제, 그 여정을 쫓는 것이 참 달달하다. 영역본으로 읽을 땐 참 힘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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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당스>보다 더 재밌을=_= <춤, 극장을 말하다>(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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