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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제임스 베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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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에는 한적한 어느 숲 속의 풍경이 펼쳐진다. 약간 흐린 날씨. 프레임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오두막 한 채가 보인다. 멀리 산 중턱에 보이던 비구름이 서서히 다가와 내려 앉고, 숲에는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산새 몇 마리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낮게 날아다니다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빗줄기는 굵어진다. 거의 반 시간에 달하는 하나의 긴 컷이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비슷한 길이의 나머지 계절별 컷에서도,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은 채 정확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앵글로 그 공간을 바라본다. 마치 스크린의 크기만한 거대한 풍경화가 2시간 동안 극장 안에 걸려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 그림은 살아있으며, 객석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프레임 안, 숲 속에서는 어떤 그럴듯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데 실은 숲 그 자체, 대자연이라는 존재 자체가 (희미하지만 절대적인) 사건이다. ‘봄’에는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들, ‘가을’에는 오두막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겨울’에는 흩날리다가 서서히 내려 앉는 눈송이들이, ‘여름’에는 해가 지면서 숲 위로 깔리는 어둠이 타임라인을 지배한다. 가만히 앉아 오랜 시간 스크린을 지켜보아야만 사건의 정수에 접속할 수 있는, 이 평범하고 느린 풍경들이 만들어내는 감동의 힘은 의외로 강력하다…

   이 감정의 동요는 영상뿐 아니라 James Benning의 나레이션에도 기인하는 것이었다. 베닝은 자연 속에 살며 ‘도시’를 공격했던 테러리스트, Ted Kaczynski라는 인물이 남긴 몇 개의 글을 낭독한다. 문명과 산업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의 카진스키의 메시지가 베닝의 목소리를 빌려, 절대 동요하지 않는 자연의 풍광 위에 쏟아진다. 그 평화로운 장면 위로 베닝의 나레이션(카진스키의 글)이 연상시키는 도시의 각종 시각공해물들을 떠올리는 순간, 스크린 위의 그 풍경이 더 이상 평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베닝은, 일면 ‘현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그 테러리스트로부터 거리두기를 잊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카진스키의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밝혀진 희생자 3명의 이름이다.)

 

   9월 6일, 서울국제실험영화제에서 “Stemple Pass”를 보고 왔다. 영화제에서는 감독 제임스 베닝의 요청에 의해 영상에 한글 자막을 입히는 대신 베닝의 나레이션을 요약한 글을 출력하여 관객들에게 나눠 주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베닝이 왜 그런 요청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는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달리 말하자면 그 프레임 안, 숲 속의 모든 작은 움직임들이 관객들 각자에게 사건으로 성립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화면의 일부를 가릴 수 밖에 없는 자막은 허용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 걱정스러운 부분도 좀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영화 시작 전에 일찍 도착하여 출력된 나레이션의 내용을 충분히 읽어보고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베닝의 의도(?)와 가까운 상태로 관람이 가능했지만, 만약 영어 듣기 능력이 충분하지 못한 관객이 출력물의 정보를 접하지 않고 영화를 보았다면, 즉 베닝의 나레이션을 그저 하나의 사운로만 감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면 영화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보다가 잠들 수 있는 확률도 더 높아질 것…). 혹시 앞으로 “스템플 패스”를 보게 되는 분들은 꼭 카진스키가 남긴 글과 행적들을 대충이라도 살피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레이션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technology will acquire something approaching complete control over human behavior”.
  이 나레이션이 흘러 나올 즈음, 내 앞에 앉아있던 관객은 스마트폰을 꺼내 한참을 만지작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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