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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안티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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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8. 
(의뢰를 받고 모 웹진에 기고했던 글. 글이 실렸던 섹션은 사라짐_)
 

누군가 자신이 스무 살 때 보고 감동받았던 연극을 아흔 살의 나이에 영화로 만든다면 그 영화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알랭 레네(Alain Resnais)는 아흔 살의 나이에 또 한 편의 장편영화를 선보였는데, 이 영화는 그가 스무 살 무렵 인상 깊게 감상했던 장 아누이의 연극 <에우리뒤케(Eurydice)>를 영화화한 것이다.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Vous n’avez encore rien vu, You Ain’t Seen Nothin’ Yet)>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이 영화는 지난 11월 22일 한국에서도 개봉되어 상영 중이다.

   알랭 레네 감독은 <밤과 안개(Nuit et brouillard, 1955)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 1959)><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L’annee derniere a Marienbad, 1961) 등의 작품으로 이미 오래 전에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감독으로 이후에도 꾸준히 영화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부지런한 거장이다. 레네는 늘 그 독특한 영화 형식으로 주목을 받아 왔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역시 매우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영화다. 레네는 장 아누이(Jean Anouilh)의 《에우리뒤케(Eurydice)》를 메인 테마로 하고 여기에 역시 장 아누이의 작품인 <사랑하는 앙투완(Cher Antoine, ou L’amour rate)>을 결합해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완성했다. 영화는 앙투완이라는 연극 연출가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는 배우들의 모습이 연이어 보여지며 시작된다. 배우들은 전화 연락을 통해 소식을 전달받는데, 각각이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댄 얼굴의 뒷모습 클로즈업만이 보일 뿐이다. 일반적인 영화에서라면 두세 명의 배우가 전화를 받는 장면에 이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겠지만, 알랭 레네는 고집스럽게 13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전화 통화를 모두 보여준다.

   이 배우들은 모두 앙투완의 성으로 초대 받아 앙투완이 남긴 영상물을 보게 되는데 여기에는 젊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에우리뒤케> 리허설 장면이 담겨 있다. 영상을 보고 있는 13명의 노배우들은 젊은 시절에 모두, 앙투완이 연출했던 연극 <에우리뒤케>에 출연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리허설 영상을 가만히 바라보거나 이따금 훈수를 두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하다가, 이윽고 실제 배우처럼 대사를 연기하고 어느 순간 영상 속의 연극과 영상을 바라보던 배우들의 연기가 뒤섞여 시공간을 초월한 <에우리뒤케>가 진행된다. 이 영화에서는 앙투완의 아지트에 있는 스크린이 하나의 액자로 기능하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액자의 경계는 사라지고 아지트는 무대가 되며 여러 층위의 연기 상황들이 포개어져 몽환적인 느낌을 전달해 준다.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알면 알수록 더 흥미로운 영화다. 알랭 레네가 처음으로 <에우리뒤케>를 관람했던 1940년대로부터 무려 70여년이 지난 지금, 그것이 영화화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두 작품 사이의 그 긴 시간의 차이가 놀랍게 다가온다. 그런데 <에우리뒤케>가 장 아누이의 완벽한 창작물이 아닌,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뒤케의 신화를 바탕으로 다시 쓰여진 희곡이라는 것을 따져보면 70년의 시간은 별로 긴 시간이 아니다. 오비디우스(Ovidius)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뒤케의 사연 역시 담겨있는 《변신이야기(Metamorphoses)》를 완성한 것이 2000년 전이다. 그리고 토마스 불핀치(Thomas Bulfinch)가 변신이야기에 기반해 역작 《그리스 로마 신화(The Age of Fable; or Stories of Gods and Heroes)》를 출간한 것이 1855년이니, 여기에 비하면 70년의 시간은 애교처럼 느껴진다.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가 근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 오래된 신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그것은 이 영화의 컨셉 자체가 이미 나이들어 늙은 배우들이 과거에 자신들이 연기했던 인물, 자신들의 나이보다 훨씬 젊은 캐릭터를 그 늙은 현재의 모습으로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빈느 아제마(Sabine Azema)와 피에르 아르디티(Pierre Arditi), 안느 콘시니(Anne Consigny)와 랑베르 윌슨(Lambert Wilson)이 각각 에우리뒤케와 오르페우스 역을 연기하는 모습,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청춘’의 캐릭터를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배우들이 열연하는 장면은 예술에서의 시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준다.

   젊음과 늙음, 수천 년 혹은 수십 년의 시간차는 매체의 형식뿐만 아니라 영화의 내용면에서도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되짚어 볼 때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가 모티브를 빌려온 장 아누이의 <에우리뒤케>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뒤케의 신화에, 이상을 쫓는 젊은이들과 세속적인 현실에 안주하는 기성세대 간의 갈등을 절묘하게 결합한 작품이다. 우리들의 사랑은 너희 같지 않았다며 혀를 차는 에우리뒤케의 부모, 사랑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르페우스의 아버지 캐릭터는 <에우리뒤케> 뿐만 아니라 다른 장 아누이의 작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한국에는 장 아누이의 작품 《안티고네(Antigone)》가 번역되어 있는데,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 역시 《에우리뒤케》와 비슷한 인물들을 보여준다. 신화 속의 폭군 크레온은 장 아누이의 작품 속에서 나름 성실한 군주로 재탄생하는데, 그는 현실과 타협하여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어른”으로서 등장하고 그렇기에, 순수함, 자유, 절대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안티고네와 갈등을 겪게 된다. 이러한 장 아누이의 작품 세계를 따져보면 레네의 시도가 얼마나 유쾌하고 전복적인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아누이는 신화를 모티브로 해서 세대 간의 갈등 양상을 비추고 있는데, 레네는 아예 젊은 세대를 늙은 배우들에게 연기하게 함으로써 그리고 젊은 연기자들의 공연 모습과 노배우들의 연기를 뒤섞어 버림으로써 갈등의 원인이 되는 ‘시간’이라는 요소를 증발시켜 버린다.

   시간이 무화되어 버린 자리에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뒤케 신화의 본래 이야기만이 남는다.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미소년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뒤케가 뱀에 물려 죽자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가 죽음과 저승의 신 플루톤과 협상을 한다. 오르페우스의 애절함에 플루톤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만약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뒤케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뒤를 돌아 에우리뒤케를 바라보지만 않는다면 에우리뒤케에게 다시 생명을 돌려주겠다고.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걱정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뒤케는 결국 저승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이 신화 속 연인들의 간절한 사랑은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젊은 배우들의 <에우리뒤케> 연극 리허설이 끝난 후에도 의외의 공간에서 언뜻 모습을 비춘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뒤케의 신화에서 에우리뒤케는 두 번의 죽음을 맞는다.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서는 마치 앙투완이 에우리뒤케의 운명을 재연하는 듯싶다. 첫 번째 죽음에는 13명의 배우들이 저승으로 내려가고, 두 번째 죽음에는 한 명의 오르페우스가 그를 향해 찾아간다. 그는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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