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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무라카미 하루키"

 

 

이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라인업에 로버트 알트만의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 1973)>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도, 원작 소설인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도 매우 좋아하는 작품들이라 상영 소식이 특히 반갑다. 극장에서 필름으로 꼭 보고 싶은 영화 중 하나인데… 상영시간표를 보니 안타깝게도 아트시네마에서 보기는 힘들 듯;;

2012년 여름부터 약 1년간 모 웹진에 영화와 책을 함께 소개하는 글을 매주 기고했었다. 그 중에 ‘기나긴 이별’을 다룬 글도 있어서 여기 옮겨 본다. 잡문이라 깊이는 별로 없고 수사가 많다. 무리한 비유까지: ‘필립 말로(of  기나긴 이별) = 고독남(of 마이클 만) in 로스앤젤레스(of 데이빗 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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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말로, 고독왕.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두 명의 “레이먼드”에 대해서 들어 보았을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와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하루키는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을 직접 일본어로 번역할 만큼 카버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인터뷰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를 “내 영웅”이라고 표현 할 만큼 챈들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계에도 두 명의 레이먼드에게 푹 빠졌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지난 2006년에 81세로 타계한 영화 감독,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이다. 틀에 박힌 제작론에서 벗어나 할리우드의 반골이라 불릴 정도로 우직하게 자기만의 세계를 개척해 온 알트만은, 역시 이 두 명의 레이먼드, 레이먼드 챈들러와 레이먼드 카버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오직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낸 바 있다. 영화 <기나긴 이별, The Long Goodbye>(1973)과 <숏컷, Short Cut>(1993)이 그 결과물인데 이 중 <기나긴 이별>에 대한 얘기를 더 해보려고 한다.

   영화의 원작소설 《기나긴 이별》은 1954년에 출간되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추리작가이며 하드보일드 문체의 대가로 불리는 레이먼드 챈들러는 그의 첫 장편 《빅 슬립, The Big Sleep》에서부터 필립 말로라는 사립 탐정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기나긴 이별》에서도 필립 말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루키의 인터뷰를 다시 언급하자면, 그는 《기나긴 이별》을 열 번 이상 읽었다고 강조하며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의 인물들은 “혼자 힘으로 살아가고 있고 매우 독립적”이며 “외롭긴 하지만 고상한 삶을 찾는” 캐릭터들로서 이것이 본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외롭긴 하지만 고상한 삶을 사는 사립 탐정… 흥미로운 것은 《빅 슬립》에서부터 출발하는 필립 말로의 하드보일드한 모습이 챈들러의 마지막 작품인 《기나긴 이별》에서는 왠지 날이 무뎌지고, 지쳐 보이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 때문일까? 어깨가 조금 더 쳐진 것 같은 말로의 모습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알트만의 누아르 필름에 딱 어울리는 캐릭터로 승화된다.   

   먼저 밝혀두는데, 소설 《기나긴 이별》과 영화 <기나긴 이별>은 결말이 다르다! 앞으로 소설과 영화를 접하실 분들을 위해 결말은 언급하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립탐정 필립 말로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친구 테리 레녹스의 부탁으로 그를 멕시코까지 데려다 주었다가 경찰에 붙잡혀 심문을 당한다. 경찰은 레녹스가 그의 부인 실비아를 죽이고 도주중이라고 얘기하지만 필립 말로는 친구의 결백을 믿는다. 한편 말로는 실종된 소설가 남편을 찾아 달라는 아일린 웨이드의 의뢰를 받게 되고 이어 마티 오거스틴이라는 갱으로부터 레녹스가 훔쳐간 자신의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당한다. 말로는 웨이드 부부의 사건을 해결하는 도중 이 모든 일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씩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탐정 소설의 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책이나 영화의 플롯이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역시 필립 말로라는 인물 때문이다. 소설에서 어떤 출판업자와 바에서 대화를 나누던 도중 말로는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 허가받은 사립탐정이고… 외로운 늑대인 셈이죠. 미혼에 중년이고 부자도 아니지요… 술과 여자와 체스… 양친은 돌아가셨으며 형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얻어맞고 쓰러진다고 해도 인생 끝난 듯이 충격 받을 사람들은 없죠. 그런 일이야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고…”

   말로의 ‘고독 지수’가 증가할 수록 챈들러의 문체는 더 흐느적거린다. “한 시간이 병든 바퀴벌레처럼 기어갔다. 나는 망각의 사막에 있는 모래 한 알이었다 나는 총알이 다 떨어져버린 쌍권총 카우보이였다.” 이 문장들 사이에, 있어야 할 구두점이 하나 없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일곱 페이지로 서술되어 있는 28번째 장은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필립 말로가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마구 뱉어내는 감상만 기록되어 있을 뿐, 이야기 전개에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문장은 맨 마지막 문장 딱 하나에 불과하다. “그때 총소리가 들려왔다.” 

   로버트 알트만이 연출한 필립 말로도 고독하기는 마찬가지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다른 소설들이 이미 영화화된 것이 꽤 있었기 때문에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도 영화 팬들에게 아주 낯설지만은 않는데, 특히 하워드 혹스의 <빅 슬립>(1964)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연기한 필립 말로가 많이 언급된다. <빅 슬립>의 필립 말로가 강인하고 섹시한 고독함을 가지고 있다면 <기나긴 이별>의 필립 말로는 고독 그 자체, 달관자의 고독, (영화에서 테리 레녹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저’의 고독을 체화한 인물이다.

   고독한 캐릭터라 하면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 Samurai>(1967)에서 알랭 들롱의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는데, <사무라이>가 알랭 들롱이 침대에 누워 담배를 물고 연기를 내뿜는 모습으로 영화를 시작하는 것처럼 <기나긴 이별>도 필립 말로가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알랭 들롱이 연기하는 제프 코스텔로는 우아하지만 엘리엇 굴드가 연기하는 필립 말로는 측은하다. 말로의 고양이는 침대에 누워있는 말로를 계속 괴롭히고, 이 고양이는 말로가 사료를 챙겨주지 않자 가출해 버린다. 고양이에게도 버림받는 말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영화 내내 필립 말로가 타인에게 외면당하는 소소한 장면들이 스쳐지나가는데, 그 때마다 그는 “난 괜찮아(It’s okay with me).”라며 혼잣말 하고 가던 길을 갈 뿐이다.

   그런데 그런 기이한 말로의 모습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알트만이 영화 안에서 그리는 세계가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마약에 중독되었는지 늘 몽환적인 목소리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해대는 이웃집 여인들, 환자들보다 더 이상해 보이는 정신병원 직원들, 유난히 멍해 보이는 마티의 부하들 그리고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폭력장면들까지. 누구나 소통의 좌절을 경험하고, 상처받고 쉬이 지쳐버릴 수 밖에 없는 현대 사회의 모습(특히 60년대 후반의 미국, LA)을 로버트 알트만 감독은 <기나긴 이별>을 통해 우화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로버트 알트만이 레이먼드 챈들러,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두 명의 레이먼드가 모두 남부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활동을 하고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은 캔자스 시티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고 대부분의 작품 활동을 남부 캘리포니아, 할리우드가 있는 LA에서 하게 된다. 아마도 그가 생활하며 늘 바라보는 LA의 숨겨진 모습을 챈들러와 카버가 날카롭게 짚어내는 것을 보고 그것을 영상으로 옮기고 싶지 않았을까?

   LA라는 도시를 단순히 이야기의 배경이 아니라 영화적 장치로 활용한 감독으로는 로버트 알트만뿐만 아니라 마이클 만과 데이비드 린치가 먼저 떠오르는데, 로버트 알트만의 <기나긴 이별>을 처음 보았을 때 마치 마이클 만 영화의 고독한 캐릭터가 데이비드 린치 영화의 괴기스러운 풍경 속을 탐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었다. 물론, 알트만이 훨씬 선배 감독이고 비약이 심한 비유이긴 하지만 같은 공간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고 있는 감독들의 작품 세계가 단단하지는 않아도 가느다란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 흥미로운 요소를 더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화 <기나긴 이별>의 음악을 언급하고 싶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은 음악에도 매우 조예가 깊었던 감독이다(재즈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캔자스 시티, Kansas City>(1996)를 꼭 챙겨보시길!). <기나긴 이별>에서는 동명의 테마곡 “The Long Goodbye”가 다양한 버젼으로 편곡, 연주되어 영화 내내 흘러나온다. 영화의 첫 장면, 필립 말로를 만나러 가는 테리 레녹스의 카 라디오에서 “The Long Goodbye”가 흘러나오고 이 노래는 이어지는 다른 장면, 필립 말로의 차 안, 그리고 말로가 방문하는 마트 안에서 계속 이어진다(같은 곡이지만 다른 뮤지션이 연주한 버전이다). 곡조가 소설과 영화 모두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곡이다. Dave Grusin Trio가 연주하는 “The Long goodbye”를 들으며 여유롭게 소설 《기나긴 이별》을 읽을 수 있다면 그만한 휴가가 없을 것 같다. 영화 <기나긴 이별> DVD도 챙기시는 것 잊지 마시고.

201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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