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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리퀴드 러브"

 

 

대부분의 인간 역사에서 ‘현존의 직접성’은 잠재적이고 실현 가능한 ‘행위의 직접성’과 중첩되었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멀리 떨어져서도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가 별로 없었다 – 또 손에 쥐고 있는 도구로는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인간이 고통당하는 장면에 노출당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우리 조상들이 직면했던 도덕적 선택 전체는 직접성, 즉 얼굴과 얼굴을 맞댄 만남과 상호작용이라는 좁은 공간에 거의 완전히 갇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은 – 그러한 것에 부딪힐 때마다 – ‘삶의 주권적 표현’에 의해 고무되고, 영향받고, 원리상으로는 심지어 통제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윤리적 명령의 침묵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숨이 막힐 듯하다. 그러한 명령이 삶의 주권적 표현을 유발하고 은밀히 이끌어주는 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들은 직접성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그러한 표현들을 촉발하고 불러일으키는 대상들은 멀리, 직접성/인접성의 공간을 훌쩍 벗어난 곳으로 떠나버렸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의 도움도 받지 않고) 주변에서 육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에 덧붙여 매일 마다 멀리 떨어진 곳의 참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행되는 잔혹 행위에 대한 ‘간접적인’(미디어화된mediated) 지식에 노출된다. 지금은 누구나 텔레비전television을 갖고 있다. 하지만 ‘텔레-액션tele-action’의 수단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우리가 볼 수 있고 완화시키거나 치유할 수 있는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삶의 주권적 표현’이 (엄청나게 어렵겠지만) 처리할 수 있는 도덕적 선택의 상황에 처하게 한다면 – 우리가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과 우리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 사이의 점점 더 벌어지는 격차는 모든 도덕적 선택에 수반되는 불확실성을 전례 없는 수준까지 끌어올리게 된다. 즉 우리의 타고난 윤리적 자질이 익숙하게 작용할 수 없는, 심지어 그럴 수조차 없는 높이까지 끌어올릴 것이다.

무력함에 대한 그처럼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는 자각으로 인해 우리는 피신처를 찾아 달아나고 싶어진다. ‘처치 곤란’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음’으로 번역하고픈 유혹은 끊임없으며, 점점 커지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리퀴드 러브], p.22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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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SNS 타임라인에는 복마전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반가운 소식들이 조금씩 섞여 있다. 시대가 하 수상하고, 유감스럽게도 관심사가 그 수상한 사건들의 그물 속에 묶여 있는 덕분에 나는 울음바다와, 역시 웃음바다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서둘러 SNS에서 빠져 나온다.

정신분열이 필수불가결한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온전한 정신으로 피 맺힌 절규와 함박웃음의 교차 상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이런 극과 극의 ‘텔레비전’들에 노출되고 또 아무렇지 않게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고 자주 되뇌었건만 이미 우리는 일찌감치 괴물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비전’ 숫자 만큼의 ‘액션’ 주체가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은 성실하게 감성 변태들을 양산해 낸다 . 

가끔 어떤 문구가 머리 속에서 떠오르고,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트위터나 페이스북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내가 포스팅 하려했던 트윗의 온도와는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나는, 뜨겁고 차가운, 타임라인 위의 다른 메세지들을 바라보면서 금새 기가 질린다. 나는 쉽게 내 감정의 온도를 뺏겨버리고, 녹아내리는 ‘멘탈’을 보존하기 위해 자꾸 달아난다. 

 

그리고 다시 해맑게 돌아가겠다는 선언 혹은 
고약한 짓으로, 이런 패턴을 응용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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