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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기 드보르"

 

 

…근래 읽었던 책들에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이 동원되더라도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 기껏해야 그 명칭을 바꿀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노예 상태보다 더 교활한 것이기에 더 나쁜 형태들의 노예 상태를 나는 상상할 수 있다 : 인간을 어리석고 불만 없는 기계 같은 것으로 변화시켜, 실제로는 노예처럼 지배를 당하면서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게 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거나, 인간적인 즐거움과 여가를 보내는 오락들을 인간에게서 배제하고, 만족들이 가지고 있는 전쟁열만큼 광적인, 일에 대한 취향을 인간에게 키워 주거나 하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 혹은 상상력의 노예 상태보다는 나는 여전히 우리의 사실상의 노예 제도를 택하겠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입을 빌어, 고대 로마제국의 노예 제도보다 “더 나쁜” 형태의 노예 제도를 상상한다. 이 가상의 “노예 상태”는 지금 현대 사회 시스템과 유감스럽게도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전쟁열만큼 광적인” 스펙타클의 희열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은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스펙타클의 풍요 속에서 수행되는 허위적인 선택은 공허한 특질들을 둘러싼 투쟁으로 전개된다. 이 투쟁은 양적이며 사소한 것들에 대한 충성을 고무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것은 허위적인 해묵은 대립, 지역주의, 인종주의를 소생시키며, 이런 반목들은 소비의 천박한 위계서열들을 터무니없는 존재론적 우월성으로까지 끌어 올린다. 이런 식으로, 경쟁적인 스포츠에서 선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끊임없는 사소한 대결들이 가소로운 이해관계들을 동반하며 거듭 설정된다.
   풍요한 소비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주로 청년과 기성세대 사이의 스펙타클적 대립이 허위적인 역할들 중에서도 맨 앞에 등장한다. 이것이 허위적인 까닭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서의 기성세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가 이미 1960년대에 목도한 “스펙타클의 풍요”로움은 여전하다. 아니 그 “공허한” 투쟁은 양적인 면에서 60년대에 비해 엄청난 수준으로 증가했다. “경쟁적인 스포츠에서 선거에 이르기까지”. 그의 서술은 마치 디씨인사이드와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게시판을 관찰하고 기록한 감상문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오래 전에 향유하던 “인간적인 즐거움”을 잃고 이제는 모니터 앞에 앉아 끊임없이 그들이 인터넷에 의견을 남기고, 댓글을 달아댈 ‘사건’들이 터지길 기대한다.    

   자유처럼 느껴진 것이 실제로는 전혀 자유가 아니었을 가능성,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이 ‘객관적’으로 결코 만족스럽지 않은 것임에도 이에 자족할 가능성, 노예제도 속에서 살면서도 자유롭다고 느끼고 자신을 해방할 그 어떤 급박한 필요도 느끼지 않게 되어 참된 자유를 누를 가능성을 저버리거나 박탈당하게 될 가능성에 관한 것…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 근대]

   늘 바쁘게 지내는 편이다. 쉴새없이 해야할 일들이 솟아난다.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어있음을 느낀다. 확실히 나도 시스템의 노예로서 충실히 복무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노예임을 깨달은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바쁨’을 기준으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가의 여부를 가릴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시스템이 만들어낸 덧없는 목표들에 매몰되어 있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퇴사를 결정하면서 이미 러닝 트랙에서 한 번 벗어나긴 했지만, 이후 다른 트랙에 (좀 더 의지적으로) 다시 진입한 덕분에.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은 계속 바쁘게 지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공허한 특질들을 둘러싼 투쟁”이 아닌 다른 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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