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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다방

 

몇 년을 늘 버스를 타고 갔었는데, 기차를 타고 순천에 간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광주에서 완행의 무궁화호를 타고 화순과 벌교를 지나 순천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열차에서 내려 역 앞 광장으로 나와 가장 먼저 고개를 돌린 곳은 역전시장 쪽이었다. 가만히 그 쪽을 향해 서서 낮은 건물들의 간판 하나하나를 살펴본다. 이제 거기에 없는 것을 알면서도 한참을 바라보다, 또 일부러 마중나오시겠다는 아버지를 기다리기 위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읽은 것은 군대에 있을 때였다. 하야리아에 배치를 받고, 몇 달 뒤 어리버리한 신병 딱지를 떼고나서 약간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일 중 하나가 부산초읍시민도서관에서 회원증을 만든 일이었다. 기형도라는 시인의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스물 두 살까지 그의 글을 일부러 찾아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에세이들이 꽂혀 있는 서가에서 책 몇 권을 뒤적이다가, 유난히 커버 디자인이 촌스러운 한 에세이집을 집어 들었다. 기형도의 사진이 표지에 박혀 있는 그 책을 빌려 부대로 돌아왔다. 

 

   그의 “짧은 여행”. 그 여정에서 아무래도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순천에 대한 것이었다. 

   무진(霧津)으로…  광주의 태양은 샛노란 빛이었다. 송수권(宋秀權)씨에 연락을 넣을까 하다가 생각을 거두고 광주역으로 갔다. 문득 순천이 눈에 들어왔고 김승옥(金承鈺)과 김현 생각이 났다… 순천은 나에게 무엇인가. 안개와 병든 지성의 도시, 부패하고 끈끈한 항구, 그리로 가기 위해 나는 광주를 떠난다.

   도시 가득 소금기 섞인 해풍이 군림하고 있다. 예상보다 규모가 크고 번화한 도시였으나 네온사인을 켠 건물들이 없었다. 검고 낮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삐죽삐죽 솟은 가운데 무슨 여관의 간판들만 허공 간간히 빛을 발하고 있어 그로데스크한 느낌을 주었다. 벌써 손끝에 끈끈한 자국이 있다… 나는 역 부근 식당에서 백반을 시켜 먹으며, 다짐을 입 속에서 우물거렸다. 창 밖으로는 시장통이다. ‘해동’다방 2층, 마담과 여급 두엇이 무료하게 TV를 보고 있다. 그렇다. 순천은 나에게 음습한 도시다.

   순천에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내게, 이제 막 순천이라는 공간에 처음 도착한 이방인의 비릿한 감상은 오히려 신선한 것이었다. 메모장에 일부 문장을 옮겨 적고 “‘해동’다방”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었다. “마담과 여급 두엇이 무료하게 TV를 보”던, 기형도가 순천에 대한 음습한 감정을 완성했던 그 장소에 가보고 싶어졌다. 헌병으로 재보직을 받고 처음 갖게된 휴가에서, 드디어 그 장소를 찾아 나섰다. 순천역 밖으로 나오자마자 시장으로 가서 건물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한참을 찾아보았지만 해동다방이라는 간판은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계신 아주머니 몇 분께 물어보고,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에 들어가 입주해 있는 가게의 사장님들께도 여쭈어보았지만 해동다방을 알고 있는 분은 아무도 없었다. 

   이 도시는 짧은 시간의 여행자에겐 쉽사리 경계를 풀지 않는 것이다. 사내들은 두서넛씩 모여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으나 가까이 가도 무슨 내용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말하는 사내들. 흐릿한 하늘엔 한 점의 별도 보이지 않는다. ‘해동’다방 2층, 이젠 일어서자. 풀기 묻은 바람이 횡행하는 거리로 나는 나갈 것이다. 나는 이 도시를 내 몸의 일부분처럼 느낀다.

 

   2012년 가을학기. 장률 감독님의 시나리오 수업을 들었다. 단편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데, 마땅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하루는 수강생들끼리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문득 해동다방 생각이 났고, 간절히 찾아 헤매었으나 결국은 찾지 못한 그 곳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게 되었다. 감독님께서는 “그 안에 무언가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지만 정작 내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진척이 너무 더뎠고, 나는 한 달여를 방황하다 다시 해동다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012년 11월 1일 목요일. 시나리오 수업은 오전 10시 시작이었다. 그 동안 써놓은 시나리오는 모두 찢어버렸고, 이제 ‘해동’다방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리라… 새벽에 일어나서 평소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섰다. 미리 학교에 가서 맑은 정신으로 한 줄이라도 더 시나리오를 써 보려는 생각이었다. 7612번 버스에 올라 맨 뒷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짧은 여행의 기록]을 꺼냈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는 기형도의 글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는 순천이 아니라 광주에서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로 한다. 그리고 버스가 양화대교 위를 달리기 시작하자, 기사님이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1월 1일이니까, ‘오늘’ 하루는 어디선가 김현식 아니면 유재하를 만나게 되리라, 그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문제는, 하필 그 순간, 내가 기형도를 따라 망월동에 들렀다 나오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제3묘원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봉고차에 탔을 때 50대 후반(혹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낙네가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소녀와 함께 봉고차에 올랐다. 퍼머 머리에 찌든 얼굴, 갈라진 두툼한 입술, 넓적한 코, 촛점이 흐린 눈동자, 검게 탄 피부, 가는 몸매, 흰 반팔 남방, 갈색 면바지, 굽없는 흰 샌들을 신은 촌부였다. “앞에 타세요.” 운전사가 말했다. 50대로 보이는 기사가 나를보며 말했다. “이한열(李漢烈)이 어머니에요.” 나는 좌석 앞으로 옮아갔다. 여인이 힘없이 인사를 했다. “묘지 다녀가세요?” 나는 “한열이 선뱁니다. 연세대학교 선배예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학교 보내면 뭘해요. 이렇게 돼 버렸는데.” 여인은 말했다. “이따금 이곳에 다녀갑니다.” 늙고 지친 얼굴이었다. 퍼머 머리의 절반이 백발이었다. “한열이 누이의 딸이예요.” 봉고차는 그녀와 나만을 싣고 달렸다. 

   모르겠다. 김현식의 목소리 때문에 더 그랬을까? 처음 읽는 것도 아닌데, 기형도가 이한열의 어머니와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퍼머 머리에 찌든 얼굴, 갈라진 두툼한 입술,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넓적한 코, 촛점이 흐린 눈동자, 검게 탄 피부, 이렇게 비가 왔어요. 가는 몸매, 흰 반팔 남방, 갈색 면바지, 굽없는 흰 샌들은 신은 촌부,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고개를 들면 바로 옆 좌석에 어머님이 앉아 계실 것만 같은, 잔인할만큼 정성스러운 묘사. 이한열이 어머니에요. 버스가 연희동에 다다를 때까지 눈물을 멈추기 힘들었다. 내가 병신같았다. 미친놈처럼 – 미치면 정말 그럴지 모르겠지만 – 울었다.  

   기말에 제출한 ‘해동다방’이라는 시나리오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 낯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내 이야기에, 어떤 의미에서든 정치색을 최대한 배제하고, 단지 아련한 사랑 이야기를 담아야겠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에 대한 필요 이상의 집착. 그 판단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시나리오는 절름발이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 광주에서 순천으로 가는 길에, 어쩌면 해동다방 시나리오를 다시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시작하게 된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반드시 ‘이야기’를 덧댈 필요는 없을 지 모른다. 그래도 아마… 오래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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