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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ny Greenwood & Krzysztof Penderecki
(European Culture Congress 09/09/2011. Wroclaw, Poland) 

 

Radiohead 때문에 Penderecki를 알게 되었다. 기타리스트 Jonny Greenwood는 오래 전부터 그가 영향을 받은 음악가 중 한 명으로 펜데레츠키를 언급해 왔다. 조니가 만든 <There Will Be Blood> 사운드트랙은 마치 펜데레츠키에 대한 오마주처럼 느껴질 정도. 결국 조니는 오랜 동경의 대상 펜데레츠키와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물은 [Krzysztof Penderecki / Jonny Greenwood]라는 이름의 음반으로 2012년에 발매되었다. 

http://www.bbc.co.uk/programmes/p00qg018

음반이 나왔을 때, BBC에서 두 사람을 인터뷰했던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스탠리 큐브릭이 펜데레츠키에게 <샤이닝>을 위한 음악을 부탁했던 일, 조니가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할 때, 처음 펜데레츠키의 음악(‘Threnody for the Victims of Hiroshima’)을 접했던 에피소드 등이 소개된다. 펜데레츠키는 손녀의 소개로 Radiohead 음악을 처음 듣게 되었다고. 

펜데레츠키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Radiohead 곡이 있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조니는 ‘How to Disappear Completely’와 ‘Climbing Up The Walls’을 예로 든다. 이제 다시 들어보니, 두 곡에 사용된 현악 연주에서 확실히 펜데레츠키 특유의 그로테스크함이 느껴지는 듯. 인터뷰 끝부분에서 펜데레츠키는 조니 개인과의 협업을 넘어 ‘밴드’ Radiohead와의 작업도 가능할 것이라고 슬쩍 언급하는 데, 이거 참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2013.12.20.
펜데레츠키가 직접 지휘한, ‘예루살렘 7개의 성문’ 국내 초연에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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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 감독님의 이번 학기 마지막 수업이 있었다. 이 [문학과 영화]라는 수업에서는, 때론 영화보다 시 이야기를 더 오래 나누곤 한다. 12일에 개봉한 감독님의 다큐멘터리 <풍경>을 얼마 전에 극장에서 보고 왔는데, 마침 ‘풍경’이라는 시가 떠올라 오늘 수업에 준비해 갔다. 체사레 파베세의 [피곤한 노동]이라는 시집에 실려있는 시다.

오래 전에 어느 블로그에서 우연히 파베세의 시를 보고 반한 적이 있다. 그래서 파베세의 그 시집을 사려고 했으나 92년에 출간된 시집은 이미 절판된 지 오래. 시집이 있는 도서관도 많지 않아, 하루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그러면 안되지만…) [피곤한 노동] 전체를 복사해 왔다.

파베세의 소설 [레우코와의 대화]를, 장 마리 스트라웁과 다니엘 위예가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몇 편의 연작을 좋아한다. [피곤한 노동]도 마찬가지.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에서 나는 [피곤한 노동]에 나오는 노동자의 모습을 본다. 벨라 타르, 그리고 토리노의 두 사람 니체와 파베세. 

[피곤한 노동]에는 ‘풍경’이라는 제목의 시가 여덟 편 실려 있다. 
그 중 첫번 째 “풍경”.

  

풍경 I (Pollo에게)

이곳 언덕 위는 더 이상 경작되지 않는다. 쇠뜨기풀과
헐벗은 바위와 황량함뿐.
이곳에선 노동이 아무런 쓸모도 없다. 언덕 꼭대기는 메말랐고
유일한 신선함은 호흡뿐이다. 여기에 오르는 것은
힘겨운 일. 언젠가 은둔자가 올라와
기력을 되찾기 위해 줄곧 머물러 있다.
은둔자는 염소 가죽을 둘러 입고,
땅과 관목숲, 둥굴에 밴 냄새,
파이프 담배와 짐승들의 끈적거리는 냄새를 풍긴다.
햇살 속에서 홀로 파이프 담배를 피울 때면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을린 쇠뜨기풀과
똑같은 색깔이기 때문이다. 방문객들이 올라와 
땀에 젖어 숨을 헐떡이면서 바위 위에 쭈그려 앉으면, 
두 눈을 하늘로 향한 채, 길게 누워 깊이 숨을 쉬는
은둔자를 발견한다. 그는 한 가지 일을 했다.
검게 탄 얼굴 위에 빨간 털이 뒤섞인 무성한 수염을
자라게 했다. 그리고 텅 빈 공터에
똥을 누어, 햇볕에 마르게 했다.

이 언덕의 계곡과 기슭은 푸르고 깊다.
포도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격렬한 옷을 입은
처녀들이 떼지어 올라와
방탕한 축제를 벌이고 저 아래 벌판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때로는 과일 바구니들의 행렬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언덕 꼭대기까지 오르지는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등에 바구니를
짊어지고 구부정히 집으로 돌아가며, 나뭇잎 사이로 잠긴다.
그들은 너무나 할 일이 많아 은둔자를 보러 오지 않으며,
그저 들판을 오르내리면서 힘겹게 괭이질을 한다.
목이 마르면, 포도주를 들이켠다. 병째 입에 대고
황량한 언덕 꼭대기를 향해 눈을 치켜뜨면서,
서늘한 아침이면 이미 그들은 새벽 노동에서
기진하여 돌아오고, 어느 거지 하나 지나가면,
들판 한가운데 웅덩이들에서 솟아나는 물은 온통
그의 차지이다. 그들은 처녀들을 향해 냉소를 흘리며
언제 염소 가죽을 둘러 입고 언덕 위에서
몸을 그을릴 거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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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결에 NPR Fresh Air 팟캐스트 리스트를 스크롤하다 “Fresh Air Remembers Jazz Guitarist Jim Hall”이라는 제목을 발견했다. 순간 머리 속이 멍해졌다. “Fresh Air Remembers…”로 시작하는 제목의 방송은 항상, 막 고인이 된 누군가를 기리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셨구나… 검색을 해보니 짐 홀 어르신의 기일은 지난주 화요일(12/10).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해당 팟캐스트를 들어보니 짐 홀이 생전에 Fresh Air에 출연해 Terry Gross 여사님과 함께했던 인터뷰가 흘러나온다. 1989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방송되었던 내용이라고( 테리 여사님의 목소리가 지금보다 훨씬 청아하다).  

Podcast: ”Fresh Air Remembers Jazz Guitarist Jim Hall”

2003년 2월 16일, 예술의 전당. 짐 홀 트리오의 공연을 보러 갔었다. 재즈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2002년 9월 LG아트센터에서 Pat Metheny Group의 공연을 보고서 한창 재즈 기타 연주에 빠져있었는데, 때마침 ‘팽만식’ 선생의 정신적 지주, 재즈 기타 마스터 짐 홀 어르신이 한국에 오셨던 것이다. 벌써 10년 전 일이지만 공연이 끝나고 나서 느꼈던 왠지 모를 먹먹함이 아직도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 때 그 공연은 결국 한국에서 열린 짐 홀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짐 홀 어르신은 올 여름까지도 공연을 하셨다).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모아둔 하드디스크를 뒤져 보니 이 사진이 한 장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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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주 아름다운 영상이 있다. 짐 홀과 팻 메쓰니가 함께 Legends of Jazz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었던 기록물. 호스트는 역시 ‘전설’인, 피아니스트 Ramsey Lewis. 인터뷰와 함께 두 사람의 라이브 연주도 포함되어 있는데, 첫 번째 라이브는 짐 홀의 연주, 두 번째 라이브는 팻 메쓰니의 연주, 방송 마지막에 진행되는 세 번째 연주는 짐 홀과 팻 메쓰니의 협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짐 홀 어르신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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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나는 때로, 피로라는 육체적인 관념을 감히 제거할 생각을 했다. 또 어떤 때에는 나는 교체의 자유를 실천하기를 훈련했다: 감동, 생각, 일 등이 중단되고 또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상태에 매 순간 놓여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 감동, 생각, 일을 노예처럼 쫓아내거나 되불러들일 수 있다는 확신이, 그것들에 꼼짝할 수 없이 사로잡힐 일체의 가능성을, 그것들에 대한 일체의 구속감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보다 더 나은 정도에까지 나아갔다: 나는 하루 일정 전체를, 내가 일단 취택하여 버리지 않을 생각을 중심으로 정리했고, 나에게서 그 생각을 좌절시키거나 나의 관심을 거기에서 분산시킬 만한 모든 것, 다른 영역의 계획들이나 일들, 중요하지 않은 말들, 그날 일어나는 수많은 자질구레한 사건들은 그 생각에, 마치 포도 나무 가지들이 기둥의 주간에 기대듯이, 지탱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때에는 반대로 나는 문제되어 있는 것을 한없이 나누기도 했다: 각각의 생각, 각각의 일은 아주 많은 수의 더 작은 생각들이나 일들로 부수어져 분할되어, 손아귀에 잘 거머쥐기에 더 쉽게 되는 것이었다. 취하기 힘든 결심들은 미세한 결정들의 먼지로 분쇄되어, 그 결정들이 하나씩 하나씩 취해지고 연계됨으로써 필연적이고 용이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철저히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여전히, 모든 자유들 가운데 가장 힘든 자유, 수락의 자유에 대해서였다. 나는 내가 처해 있는 상태를 바랐다. 내가 주위에 의존해 있던 시절, 나의 그 예속적인 상태는, 내가 그것을 유익한 훈련으로 여기기를 받아들일 때, 그것이 가지는 쓰라림이나 심지어 모욕적인 것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선택했으며, 다만 그것을 전적으로 소유하고 가능한 한 가장 잘 음미하도록 했다. 더할 수 없이 지루한 일이라도, 거기에 열중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나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힘들지 않게 이루어졌다. 한 대상이 나에게 혐오스럽게 느껴지면 곧, 나는 그것을 검토의 대상으로 삼고, 거기에서 즐거움의 동기를 이끌어내도록 나 자신을 능란하게 강제했다. 예견치 못했거나 거의 절망적인 사태, 적군의 매복이나 해상 폭풍우 같은 상황에 마주쳤을 때, 다른 사람들에 대한 모든 조처가 취해진 후, 나는 그 우연을 환대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예기치 못한 것을 즐기기에 전념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면 그 매복이나 폭풍우는 마찰 없이 나의 계획이나 갈망 속에 통합되는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1권, p.79~80,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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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Bowie , “Jump They Say”
Directed By Mark Romanek

Criterion에서 발매된 DVD, “Two Films by Chris Marker: La Jetée/Sans Soleil”에는 데이빗 보위의 뮤직비디오 “Jump They Say”에 대한 짧은 부록 영상이 포함되어 있다. 뮤직비디오 대신 수록되어 있는 이 짤막한 다큐먼트의 뉘앙스는 DVD의 주인공인 마커 못지 않게 보위도 대단한 아티스트라는 ‘당연한’ 얘기. 마커의 “환송대”에서 영감을 얻은 것임이 분명한 이 뮤직비디오에서 보위가 맡은 역할처럼, 보위는 미래에서 온 생명체일 것이라고 내레이터는 운을 띄운다. 그렇기 때문에 보위가 늘 한 발 앞서 펑크에서 뉴웨이브까지, 글램록에서 테크노까지 온갖 장르를 종횡무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마커의 작품집에 조금은 뜬금없이 보위가 등장하게 된 것은 어쨋든 이 뮤직비디오 “Jump They Say” 때문인데, 사실 이 뮤직비디오를 통해 주목해야 할 사람은 보위가 아니라 “Jump They Say”의 감독 Mark Romanek이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Jump They Say”를 보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환송대”의 고문 장면을 인용한 장면이기는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 고다르의 “알파빌”과 큐브릭의 “시계 태엽 오렌지”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로마넥이 흥미로운 점은 “Jump They Say”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레퍼런스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역시 로마넥이 만든 뮤직비디오인 Madonna의 “Bedtime Story”를 보면 무려; 파라자노프의 “석류의 빛깔”,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에서 가져온 설정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마크 로마넥의 최근 작업 중 인상적인 것은 Jay-Z와 함께한 “Picasso Baby”(with “Picasso Baby: A Performance Art Film”)이다. 이 작업은 로마넥이 Marina Abramovic의 퍼포먼스 “The Artist is Present”에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인데, “Picasso Baby”에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 (“The Artist is Present”의 다큐멘터리 필름은 현대카드 디자인 갤러리에서 상영중…)

2013.10.4
   

“Never Let Me Go”가 이 양반이 만든 영화다. 하…
“나를 보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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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송전탑 분신 자결의 진상 /이계삼

‘밀양 송전탑’ 전력난 때문? MB사기극 뒤처리 위해

[송전탑, 무엇이 문제인가] 도시는 땅속으로, 농촌은 땅위로… 고압 송전선 ‘도농 차별’

[인터뷰] 주민들 ‘내가 밀양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이유’

밀양 송전탑의 진실을 알리는 10문 10답 

2013.10.01 첫날 상황정리

 

‘밀양 송전탑’ 뉴스
트위터  https://twitter.com/765Kv_OUT
블로그  http://my765kvout.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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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한 방)

 

‘타이포잔치 2013′ 전시에서 [서점들] 섹션을 보고,
예전에 방문했었던 몇몇 서점들을 떠올려 봤다.
그 중 ‘색깔(!)’이 가장 뚜렷했던 곳은 ‘Socialist Action’.

   이름 그대로 ‘사회주의 행동’ 연맹의 오프라인 거점이기도 한 이곳에서는 [Socialist Action]이라는 신문을 정기적으로 발행하고 있었고, 판매하는 대부분의 책들은 역시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이었다. 위 사진에도 조그맣게 보이지만, “운영시간에 문이 닫혀있을 경우에는 화살표 방향의 벨을 눌러주세요’ 라는 문구가 문에 붙어있었다. 내가 갔을 때도 문이 잠겨 있었는데, 벨을 누르니 수염을 기른 젊은 남자가 서점 안 쪽에서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관광객인데 그냥 잠깐 책 좀 보고 가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그러라고 하면서 어디서 왔는지 내게 물어봤다. 내가 “코리아”라고 대답하니 그는 바로 내게 물었다. “North? or South?” 남한에서 왔다고 하니, 그러냐고 하며… 자기는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인터내셔널대회에 얼마 전 다녀왔는데 거기서 North 친구들을 만나 같이 놀았었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리고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South는 지금 괜찮냐고 물어왔다(한창 정일씨가 미사일 드립을 날리던 시기였다). 크게 걱정할 상황이 아니라고 얘기해주고, 계속 서점을 둘러보았다.

Socialist Action 웹페이지: http://socialistaction.org/

 

 

   같은 날 비트닉의 본산, ‘City Lights Bookstore’에도 들렀다. ‘City Lights’에서 ‘Socialist Action’ 으로, 거기서 다시 ‘LaborFest’로. ‘LaborFest’는 우리로 치면 ‘노동영화제’같은 행사. 조그마한 극장에서 영화제 한 섹션을 보고 나왔다. 그때 필름으로 찍었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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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orFest 상영이 있었던 극장, ‘Roxie Theatre’ 안에서 상영 전 잠깐 찍은 사진. 나름 ‘극장’이라고 하니 어느 정도 규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작은 공간이었다. (앞뒤 폭은 필름포럼 상영관 크기만한데 좌우 폭이 필름포럼의 2/3 정도?) 관객은 나를 포함해 열 명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왠지 ‘우리는 하나’라는 보이지 않는 연대감을 그들에게 강하게 느끼며 영화를 보았던 기억.

이 날의 프로그램
International Working Class Film & Video Festival

Breyani and The Councillor (22 min.) 2006 South Africa
By Sally Giles & Fazel Khan 
This film shows the struggle for decent housing and jobs in a township in Durban. The residents begin to struggle for justice and are met with repression. 

Rail Against Privatization (60 min.) 2005 UK
By Platform Films
This tells the story of the effort to fight the privatization of British Rail which was carried out under former PM Thatcher and now continued by “New Labor” PM Tony Blair. http://www.rmt.org.uk

Dangerous Containers (6 min.) 2006 
By Fire Brand Productions
This documentary tells the story of Ms. Florida and the disaster that befell her when an overloaded container from the port of Miami collapsed on her car. It was made by the Teamsters union to educate people about the dangers on the road and the lack of protection for truck drivers who speak out.

Hector Girado, A Colombian Story (25 min.) 2004
By Julie E. Rosenberg
Dozens of Colombian trade unionists, in order to escape death sentences, were forced to come to the United States. This film tells the story of Hector Girado and his visit to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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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다는 것

마치, 생트 콜롱브의 오두막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얼어붙은 나무판자에 귀를 바짝 대어보는 마랭 마레처럼, 펼쳐진 책장 사이에 문득 머리를 박고 세상의 모든 아침 속에 연주될 음악들을 기다린다. 마레가 축축한 오두막 밑에서 3년을 넘게 기다려 조우할 수 있었던 콜롱브의 작품들, 루이 14세가 그렇게 듣고 싶어 했던 콜롱브 부녀의 삼중주, 마들렌의 병상 앞에서 마레가 연주했던 [꿈꾸는 여인]은 과연 어떤 선율을 담고 있었을까. 책과 독자인 ‘나’를 둘러싼 당연한 침묵 속에서도 부질없는 시도를 행하는 까닭은, 파스칼 키냐르의 세계 속에서 등장하는 음악은 늘 침묵에 수렴하는 순간에 작은 기적을 일으키기 떄문이다.   

   생트 콜롱브가 비에브르강 물결을 바라보다 ‘몰아’의 경지를 체험하고 오두막으로 돌아와, [회한의 무덤]을 “거의 소리가 나지 않게 연주”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죽은 아내와 재회할 수 있었다. <은밀한 생>에서 ‘나’는, 네미 샤틀레가 피아노를 치지 않으면서도 피아노를 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 “소리 없는 피아노”를 떠올리며, 모든 곡들이 무성으로 연주되는 연주회장을 상상해 보는 ‘나’. ‘나’는 제아미 모토키요라는 15세기 일본의 한 작가가 고안한 침묵의 악기를 소개한다. 가죽이 아니라 비단으로 씌워진 이 북은 두드리는 자에게 “가장 깊은 침묵만을” 끌어낼 뿐이다. 그 침묵에 비관해 한 남자가 호수에 몸을 던졌을 때, 그를 집어삼킨 호수 표면의 마지막 물결이 지워지는 순간, 그제서야 북소리는 공간을 채우고 ‘공주’는 익사자를 욕망하며 죽은 자를 불러내려 한다.

   마랭 마레와 생트 콜롱브는 실존했던 인물들이고 실제로 그들이 만든 곡들이 파스칼 키냐르의 소재로 쓰인 까닭에, 소설 <세상의 모든 아침>에 등장하는 음악이 궁금하다면 역시 키냐르의 작업이라 할 수 있는(그가 각본을 다듬고 그의 친구 조르디 사발이 음악을 담당한),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사운드트랙을 듣는 것으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고 그 각각의 재현이 완벽할 수 없듯, 조르디 사발이 연주하는 [바디나주]와 소설 속 마레가 연주하는 [바디나주]는 전혀 다른 것이다. “1689년, 23일째 되던 날 밤” 마침내 이뤄진 콜롱브와 마레의 합주를 듣기 위해서, 독자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아니라 ‘침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침묵 속에서 ‘나’의 삶을 키냐르의 시간과 교환하여 콜롱브의 오두막 밑에 몰래 숨어들어가는 수 밖에.

   기억해야 할 것은, 콜롱브의 얘기처럼 침묵 그 자체가 “진정한 음악”은 아니라는 점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 스스로의 존재를 비웠을 때, 책 속의 삶들이 독자 안을 채울 수 있는 것처럼, 침묵은 하나의 가능성이자 전제조건이 된다. 강풍 속에서 아리아의 저음을, 소년의 오줌 소리에서 꾸밈음 스타카토와 반음계 하강음을 발견해 내려면 침묵이라는 이름의 프리즘이 필요한 것이다(물론 침묵을 통과한 침묵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음악으로 비춰질 수 있을까. 콜롱브가 마레를 제자로 받아들였던 것이 마레의 망가진 목소리, 그 속에 배어나왔던 고통 때문이었던 것처럼, 귀가 열려있는 누군가에게는 ‘나’ 또한 하나의 소리, 어떤 음악으로 각인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적어도 키냐르의 책을 읽고있는 순간 만큼은 그리 나쁘지 않은 음악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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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에는 한적한 어느 숲 속의 풍경이 펼쳐진다. 약간 흐린 날씨. 프레임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오두막 한 채가 보인다. 멀리 산 중턱에 보이던 비구름이 서서히 다가와 내려 앉고, 숲에는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산새 몇 마리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낮게 날아다니다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빗줄기는 굵어진다. 거의 반 시간에 달하는 하나의 긴 컷이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비슷한 길이의 나머지 계절별 컷에서도,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은 채 정확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앵글로 그 공간을 바라본다. 마치 스크린의 크기만한 거대한 풍경화가 2시간 동안 극장 안에 걸려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 그림은 살아있으며, 객석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프레임 안, 숲 속에서는 어떤 그럴듯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데 실은 숲 그 자체, 대자연이라는 존재 자체가 (희미하지만 절대적인) 사건이다. ‘봄’에는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들, ‘가을’에는 오두막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겨울’에는 흩날리다가 서서히 내려 앉는 눈송이들이, ‘여름’에는 해가 지면서 숲 위로 깔리는 어둠이 타임라인을 지배한다. 가만히 앉아 오랜 시간 스크린을 지켜보아야만 사건의 정수에 접속할 수 있는, 이 평범하고 느린 풍경들이 만들어내는 감동의 힘은 의외로 강력하다…

   이 감정의 동요는 영상뿐 아니라 James Benning의 나레이션에도 기인하는 것이었다. 베닝은 자연 속에 살며 ‘도시’를 공격했던 테러리스트, Ted Kaczynski라는 인물이 남긴 몇 개의 글을 낭독한다. 문명과 산업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의 카진스키의 메시지가 베닝의 목소리를 빌려, 절대 동요하지 않는 자연의 풍광 위에 쏟아진다. 그 평화로운 장면 위로 베닝의 나레이션(카진스키의 글)이 연상시키는 도시의 각종 시각공해물들을 떠올리는 순간, 스크린 위의 그 풍경이 더 이상 평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베닝은, 일면 ‘현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그 테러리스트로부터 거리두기를 잊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카진스키의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밝혀진 희생자 3명의 이름이다.)

 

   9월 6일, 서울국제실험영화제에서 “Stemple Pass”를 보고 왔다. 영화제에서는 감독 제임스 베닝의 요청에 의해 영상에 한글 자막을 입히는 대신 베닝의 나레이션을 요약한 글을 출력하여 관객들에게 나눠 주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베닝이 왜 그런 요청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는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달리 말하자면 그 프레임 안, 숲 속의 모든 작은 움직임들이 관객들 각자에게 사건으로 성립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화면의 일부를 가릴 수 밖에 없는 자막은 허용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 걱정스러운 부분도 좀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영화 시작 전에 일찍 도착하여 출력된 나레이션의 내용을 충분히 읽어보고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베닝의 의도(?)와 가까운 상태로 관람이 가능했지만, 만약 영어 듣기 능력이 충분하지 못한 관객이 출력물의 정보를 접하지 않고 영화를 보았다면, 즉 베닝의 나레이션을 그저 하나의 사운로만 감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면 영화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보다가 잠들 수 있는 확률도 더 높아질 것…). 혹시 앞으로 “스템플 패스”를 보게 되는 분들은 꼭 카진스키가 남긴 글과 행적들을 대충이라도 살피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레이션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technology will acquire something approaching complete control over human behavior”.
  이 나레이션이 흘러 나올 즈음, 내 앞에 앉아있던 관객은 스마트폰을 꺼내 한참을 만지작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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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인간 역사에서 ‘현존의 직접성’은 잠재적이고 실현 가능한 ‘행위의 직접성’과 중첩되었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멀리 떨어져서도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가 별로 없었다 – 또 손에 쥐고 있는 도구로는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인간이 고통당하는 장면에 노출당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우리 조상들이 직면했던 도덕적 선택 전체는 직접성, 즉 얼굴과 얼굴을 맞댄 만남과 상호작용이라는 좁은 공간에 거의 완전히 갇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은 – 그러한 것에 부딪힐 때마다 – ‘삶의 주권적 표현’에 의해 고무되고, 영향받고, 원리상으로는 심지어 통제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윤리적 명령의 침묵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숨이 막힐 듯하다. 그러한 명령이 삶의 주권적 표현을 유발하고 은밀히 이끌어주는 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들은 직접성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그러한 표현들을 촉발하고 불러일으키는 대상들은 멀리, 직접성/인접성의 공간을 훌쩍 벗어난 곳으로 떠나버렸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의 도움도 받지 않고) 주변에서 육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에 덧붙여 매일 마다 멀리 떨어진 곳의 참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행되는 잔혹 행위에 대한 ‘간접적인’(미디어화된mediated) 지식에 노출된다. 지금은 누구나 텔레비전television을 갖고 있다. 하지만 ‘텔레-액션tele-action’의 수단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우리가 볼 수 있고 완화시키거나 치유할 수 있는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삶의 주권적 표현’이 (엄청나게 어렵겠지만) 처리할 수 있는 도덕적 선택의 상황에 처하게 한다면 – 우리가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과 우리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 사이의 점점 더 벌어지는 격차는 모든 도덕적 선택에 수반되는 불확실성을 전례 없는 수준까지 끌어올리게 된다. 즉 우리의 타고난 윤리적 자질이 익숙하게 작용할 수 없는, 심지어 그럴 수조차 없는 높이까지 끌어올릴 것이다.

무력함에 대한 그처럼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는 자각으로 인해 우리는 피신처를 찾아 달아나고 싶어진다. ‘처치 곤란’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음’으로 번역하고픈 유혹은 끊임없으며, 점점 커지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리퀴드 러브], p.22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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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SNS 타임라인에는 복마전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반가운 소식들이 조금씩 섞여 있다. 시대가 하 수상하고, 유감스럽게도 관심사가 그 수상한 사건들의 그물 속에 묶여 있는 덕분에 나는 울음바다와, 역시 웃음바다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서둘러 SNS에서 빠져 나온다.

정신분열이 필수불가결한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온전한 정신으로 피 맺힌 절규와 함박웃음의 교차 상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이런 극과 극의 ‘텔레비전’들에 노출되고 또 아무렇지 않게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고 자주 되뇌었건만 이미 우리는 일찌감치 괴물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비전’ 숫자 만큼의 ‘액션’ 주체가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은 성실하게 감성 변태들을 양산해 낸다 . 

가끔 어떤 문구가 머리 속에서 떠오르고,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트위터나 페이스북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내가 포스팅 하려했던 트윗의 온도와는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나는, 뜨겁고 차가운, 타임라인 위의 다른 메세지들을 바라보면서 금새 기가 질린다. 나는 쉽게 내 감정의 온도를 뺏겨버리고, 녹아내리는 ‘멘탈’을 보존하기 위해 자꾸 달아난다. 

 

그리고 다시 해맑게 돌아가겠다는 선언 혹은 
고약한 짓으로, 이런 패턴을 응용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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